[제8회 대한민국 경제올림피아드]
2000년 가을이었습니다.
그 무렵이면, 혹독한 IMF 체험기를 치르느라, 남편의 실직, 창업, 그리고 실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려움들을 무섭게 겪어내고, 전세 보증금을 담보로 톡톡히 수업료마저 치러낸 직후였습니다. 태어나 살던 곳에서는 도저히 취직조차 할 수가 없어, 멀리 지방의 소도시로 옮겨 살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어렵사리 겨우 남편의 취직이 성사 되었기에, 물설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어찌 살까 걱정해 볼 여력도 없이 바쁘게 이삿짐을 꾸려 아이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근 이년만이던가, 이제는 저에게도 기다릴 수 있는 남편의 월급날이 생기게 되었고, 곧 작으나마 저축을 할 수도 있으리라 들뜬 꿈을 꾸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그 무렵, 난데없이 한 통의 우편물이 제게 날아들었습니다. 그 날도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인근 슈퍼를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그저 노랗기만 한 편지봉투 한 개가 저희 집 우편함에 꽂혀져 있더군요. 딸아이가 봉투를 집었고, 엄마 이름이라며 제게 건네주는 것을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식탁에 올려 두고서는 잠시 잊었습니다.
대충의 손질로 저녁식사 준비를 마무리 지어둔 후 잊었던 봉투를 열어 내용 확인을 하는 동안에도 사실은 어떤 내용의 우편물인지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습니다. 채권이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에 적혀져 있었고, 변제의무가 발생했다는 둥, 금번의 특별 변제기간을 이용하면 이자를 감면해 주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문장들이 마구잡이 적혀져 있었던 것 입니다. A4용지 한 장을 가득 메운 내용 중 제가 선명하게 이해하고 읽어 버릴 수 있는 건, 제 이름 석자뿐이었던 것입니다.
잠시의 망설임 후, 몇 번쯤의 심호흡을 한 후 내용에 적혀져 있는 연락처로 전화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지역번호까지 친절하게 적혀져 있는 그곳은 우리가족이 떠나온 곳 이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제가 어딘가에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모양인데, 저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연체해 두었나 보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신용카드 대금 몇 백 원을 연체한 사실을 몰랐다가 한참이나 지난 후에 그만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믿기지는 않으나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들었기에, 저 또한 제가 모르는 사이, 어떤 요금을 그만 연체하고 말았구나 창피함에 얼굴까지 벌개졌습니다.
그랬기에 수화기에다 대고 재빨리 외쳤습니다. 제 이름 아래에 적혀져 있는 채권번호 담당자님을 바꿔 달라고요. 어서 빨리 이 일을 마무리 지은 후 얼큰하게 김치찌개를 끓일 작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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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씨 아시죠?"
몇 번의 본인 확인을 거친 후 대뜸 수화기 안의 목소리가 제게 묻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설기만 한 목소리에게서 생뚱맞게도 귀에 익은 이름 석 자가 들려오더라고요. 순간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두 번 다시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없는 이름임에 틀림이 없었거든요.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달랑 A4지 한 장의 종이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무게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가슴이 세차게 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서 있을 힘마저 잃어버려 스르르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 그 순간 제게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느 분의 보증을 섰고, 대출금 전액이 상환되지 않은 채 채무자와 연락이 끊겨버렸기에, 그 다음 단계인 보증인 아버지에게 대출 원리금에 대한 변제의무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만큼의 변제의무를 이행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내내 속만 끓이다 그만 삶을 포기해 버릴 결심마저 하고만 것 인지, 자세한 내막은 도무지 알 길이 없는데, 한 순간 전 거금 팔백만원의 빚을 갚아야만 하는 채무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김민정씨 찾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아세요?"
남자 직원의 퉁겨지듯 내뱉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왕왕 울려대기만 할 뿐 뭐라 한 마디조차 항변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쪽의 주장대로라면 일 년이면 한 두 차례 변제의무의 내용을 담은 우편물을 꼭꼭 발송을 했다는 것이고, 저는 노란봉투를 받아든 것이 진실로 그 날이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난생처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의 한복판에 그만 던져지고 보니, 일을 어떻게 진행해 가야 하는 것인지, 수습은 또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철없이 아무생각 없이 전화기 버튼을 꾹꾹 눌러 대었던 조금 전의 제 모습을 깨끗하게 지워 버리고만 싶었을 뿐입니다.
그나마 동생이 둘이 있어 채무금액이 조금은 줄어들었다며, 위로랍시고 목소리는 제게 말합니다. 혼외자이긴 하나 아버지의 자식으로 등재되어 있으므로,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청구를 할 방침이라고 친절하게도(?) 알려주더군요.
몸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거머리를 떼어내듯 급하게 그 날의 통화를 끝을 냈습니다.
아버지가 뭣 때문에 이제 겨우 마흔 아홉인 나이에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렸던 것인지,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리 썩 반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후부터 전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저녁상을 차리면서도, 아이들 목욕을 시키면서도 내내 심장은 쿵쿵 방망이질을 쉼 없이 해대었고, 머릿속은 생각들로 온통 난리법석이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잠든 깊은 밤이면 인터넷을 뒤져가며 해결방법을 찾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팔백 만원이라니, 팔십만 원의 현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에게, 난데없이 팔백 만원을 내어 놓으라니 구경조차 해 보지 못한 돈을 빚이라며 모월모시까지 갚지 않으면 남편에게 알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재도구 등에 가압류 딱지를 붙여두는 일마저 집행 하겠노라 당당하게 소리치는 괴물 같은 사람들로 부터 아이들과 내 가정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생각만으로 수많은 법률 사이트 내 상담코너를 클릭하고, 일 분에 몇 백 원 씩 하는 전화 상담을 하느라 수화기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상속포기, 한정승인 등이 의미하는 내용들을 찾아다니며, 과연 제가 구제받을 수 있는지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아버지 살아생전 소유 하셨던 경차 한 대, 내용을 알 수 없는 (찾아봐야 푼돈일 뿐 이라시던...)보험 등을 처분해야하는 이유 등으로 인감증명과 인감도장 등을 삼촌과 고모에게 건네 드렸던 기억들이 어슴푸레 떠오르면서 실낱같은 희망마저 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처분할 수 있는 절차가 아버지에게서 저에게로 명의가 바뀌었다가, 그리고 새로운 실소유자로 넘어가는 것이라, 그때 당시에는 회사에 매여 있어야 했던 사정으로 삼촌과 고모가 요구하시는 대로 서류와 도장을 준비해 드렸던 것입니다. 처분해서 생긴 비용은 당연히 일흔이 넘은 할머니와 새어머니, 그리고 어린 두 동생들의 생활자금으로 쓰일 것이라 했고, 그 후로 곧 그 일들을 잊었습니다. 그러니 상속포기도 한정승인도 저에게는 모두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빚을 갚아야만 하게 생겨버린 것입니다.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벨은 울려댔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어떤 날은 매달리며 통사정을 해보기도 했지만,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법이라는 게 권리를 보호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 야차보다 더 무섭고 야속하다는 것을 절감하던 때였습니다.
하루하루 상환일자는 다가오고, 견디다 못해 마지막 필살의 무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말끝마다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그들의 말처럼, 저 또한 법대로 한번 해보자 했던 것입니다. 장문의 내용을 담은 내용증명을 발송하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 자살의 원인이 채무변제에 대한 독촉에 시달리다 그렇게 된 것이고 보면, 빚을 갚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배상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억울해서라도 아버지의 목숨까지 앗아간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질 까닭과 의지가 없음을, 원통하고 분함을 나열하는 것으로 모양새를 갖추어 그 날로 우체국으로 달려가 발송도장을 찍어 버렸습니다.
한번 해 볼 테면 해보라지... 그날만큼은 기세가 하늘이라도 찌를 듯 자신만만 세상에 아무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목숨보다 더 한 것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있던 것을요... 갚아야할 빚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죽어서도 안 되는 것이던걸요.
결론적으로 '내용증명의 발송'은 치명적인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하여 'OO보증보험' 채권관리팀을 그만 들쑤셔 놓은 결과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김민정씨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어디 끝까지 한번 가봅시다. 우리 돈 안 갚고 배길 수 있는지..."
무섭고 소름 끼치는 최후통첩이 날아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다섯 시간 걸리는 이 도시로 날아와 볼품없고 구질구질하기만 한 살림살이들에 빨건 딱지들을 덕지덕지 붙여 댈 기세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에게 알릴 수 없는 나의 속내를 그들은 아주 잘 활용했습니다. 신경계통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지극히 예민하여 몇 번의 병치레를 앓았고, 체력 또한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라 매사 늘 조심하며 생활하는 사정을 그간 몇 번의 전화통화 중 구걸하듯 매달리며 말해둔 것을 그들은 역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시 남편이 쓰러지는 것을 보느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쟁을 치르느라 집안 곳곳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겪어 내느니, 차라리 '그깟 돈 팔백 만원' 갚아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우스운 것인가 봅니다.
귀한 나의 가족과 소중한 가정이 위협 받는 순간에 이르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서 빨리 갚아 버리고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소망에 듣도 보도 못한 거금 팔백만원이 '그깟 돈 팔백만원'이 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팔십만 원의 현금조차 없었으므로, 팔백만원의 빚을 내어야 했습니다. 직업도 없는 그저 주부이기만 한 제가 팔백만원의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 문을 두드리는 건, 허공에다 발길질을 해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속 편하게 이율계산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빌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용카드의 사용 한도액의 인심이 후하던 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이름있는 OO캐피탈 등에서도 신용대출 상품을 내어 놓기도 했구요. 가전제품 몇 가지를 할부를 이용해 구매를 했던 것이 우수회원의 자격을 제게 주어, 육백만원을 최장 36개월 할부로 대출해 주겠다는 안내엽서를 가계부 사이에 챙겨 두었었습니다.
무엇보다 유혹적이었던 건, 전화 한 통만으로 단번에 대출금이 통장으로 입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갚을 수 있을까 없을까가 아니라, 과연 정말 단 한 번의 확인절차 없이 통장으로 돈이 입금 될까 여부를 두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전화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개인정보활용에 동의버튼을 누르니, 대출금액과 상환기간을 입력 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 왔습니다.
휴...큰 숨 한번 몰아쉬고 육백만원을 삼십육개월에 걸쳐 갚겠다는 의미를 담은 메시지를 꼭꼭 힘을 주어 눌렀습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져버릴 지경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수수료얼마를 공제하고 실제 입금될 금액의 설명이 들려오면서 매월 상환일자와 금액에 대한 멘트가 줄줄이 이어져 들려왔습니다. 드디어 대출절차가 끝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얼마동안은 함부로 통장의 잔액확인을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돈이 입금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사리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여분이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 후 통장확인을 해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대출이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부족한 금액 이백만원은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자투리 모자라는 몇 만 원은 생활비에서 살짝 가져왔고요.
'OO보증보험 채권관리팀' 으로 던져 버리듯 '그깟 돈 팔백만원'을 보내 버렸습니다. 허탈 하면서도, 마음한편 속은 후련하더군요. 적어도 오늘밤부터는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구나 싶었으니까요. 며칠 뒤 OO 보증보험 채권 관리팀으로부터 우편물이 왔습니다. 채무액 팔백만원에 대한 완납 증명서 이면서, 이상으로 본 건에 대한 아버지 장녀인 저의 의무는 종결한다는 내용으로 커다란 도장이 쾅 하고 찍혀져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삼년동안 알뜰살뜰 아끼고 모아, 허리띠 질끈 동여맨 체 열심히만 살아내면 매월 원리금 납부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저만의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일처럼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듯, 부지불식간에 생겨나는 황망한 일 등은 평생에 한 번만으로 면역력이 생겨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꼬박꼬박 원리금을 납부 해야만 하는 삼십육개월의 시간동안 저와 가족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두 번의 이사를 해야 했으며, 또 다시 남편이 실직을 했습니다. 빚을 내어 빚을 갚고, 빚을 내어 이사를 하고, 빚 낸 돈을 가지고 한 달을 생활해야 하는 끔찍한 나날들이 연이어졌습니다. 견디기에만도 힘에 겨운 시기였습니다. 두 번째 이사를 하면서는 다시금 떠났던 도시로 되돌아왔습니다. 직장이 없어졌으니, 더 이상 낯선 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용기도 없었던 것입니다.
누더기에 깡통을 들지만 않았을 뿐, 뼛속까지 거지가 되어 2001년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은 어리기만 한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겨두고 맞벌이를 시작했습니다. 태산 같기만 한 빚의 무게에 짓눌러 가만히만 있어도 숨이 턱에 차오를 지경이었습니다. 팔백만원이 없어 시작된 빚은 그동안 줄어들기는커녕 불어나기만 하여서, 이제는 매월 칠백만원이 넘는 금액이 통장 내에 존재해 있어야지만, 연체를 면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카드란 카드는 죄다 현금서비스를 한도 끝까지 뽑아 낸 후였고, 카드 돌려막기만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어, 캐피탈 등에 몇 건의 대출이 더 잡혀져 있었습니다.
더 더욱 끔찍한 일은 이지경이 되도록 아직까지 남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 두 차례 말할 기회를 놓치고 나니, 점점 더 고백할 기회는 사라져만 갔습니다. 남편은 그저 두 번의 이사와 두 달 가량 가계수입의 충당으로 신용카드 현금서비스가 애용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실상은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금액도 이미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고요. 또다시 남편이 쓰러지든, 제가 죽어 없어지든 무슨 결딴이 나야 할 것만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맞벌이를 시작해서 남편과 제가 처음 벌어들인 돈은 남편이 백만 원, 제가 칠십만 원, 이것저것 모두 공제하고 나면 실수령액은 백오십만원이 조금 넘곤 했습니다.
다섯식구 생활비만 하기에도 빠듯한 금액이었지요. 백만원을 생활비로 사용하고 나머지 것을 가지고 빚을 갚는다고 하여도, 매월 발생하는 이자만 겨우 갚아질 뿐, 원금의 크기는 꿈쩍도 하지를 않습니다. 단 하루도 연체를 하지 않으려면 매월 칠백만원이 넘는 돈이 통장에 입금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또한 한 두 달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그달치 결제금액이 부족했습니다. 뼈와 살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지경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있어도, 집안일을 하는 중에도 늘 마음은 딴 데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었지요. 마치 허깨비 같았습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인터넷 세상에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무보증.무담보.무서류 대출" "5분이내 통장으로 입금" "휴대폰만 있으면 300백만원까지 신속대출" 등의 문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고만 싶었던 제게, 이건 필시 희망으로 똘똘 뭉친 든든하게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차라리 걱정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각종 포털 싸이트들 마다에서 번쩍번쩍 저마다 대출이 가능하다 알려대고 있는데, 저토록이나 자금이 많은 것인가! 3분마다 최고 삼백만원씩의 현금들이 신청자의 통장으로 입금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돈들이 있어야 할 텐데! 부족하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하는 틈틈이 상담신청 버튼을 클릭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담가능시간에 맞추어 전화가 걸려왔고, 대출에 필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습니다. 5분이내 통장으로 입금, 신속대출 등 광고에서 보았던 만큼의 발빠른 진행은 아니었지만, 대출만 가능하다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질 않았습니다.
이 지경에서 하루라도 연체가 되어 신용 불량자가 되어 버리면 거기서 인생은 끝나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온전한 사회인의 구실도, 엄마일수도 아내일수도 없이 몰락하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노릇이었습니다. 지금은 억울하다 넋두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오늘 결재해야할 금액을 입금시켜두는 일이 더 급하던 때였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게 된 것은, 인터넷을 가득 메우며 대출광고를 하는 업체들이 실제로 대출을 집행해 주는 금융기관이 아닌 대출알선을 해 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대출 중계업체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번번히 '대출불가' 판정을 받기 위해 신용정보 조회 횟수만을 올려두고, 나중에는 조회 수 때문에 더 이상 대출가능여부의 문의조차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야 제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어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곳이, 실제 대출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아주 높으나 이자율만큼은 아주 무시무시한 외국계 대부회사였습니다. 그 쪽에서 원하는 대로 저의 신용조회를 했던 곳들에 모조리 연락을 취해 대출이 진행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발급받아 접수하는 조건으로 백오십만원의 대출이 가능하겠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초 대출의 신청은 정해진 지점으로 방문해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구비서류와 함께 접수하여 두면 하루 이틀 안으로 대출금이 입금 될 것이라는 담당자의 설명을 끝으로 방문일자를 정해두자는 다그침에 선뜻 확답을 하지 못한 채로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불현 듯 덜컥 겁이 났던 것 입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낯선 곳으로 찾아갔다 예기치도 못한 일을 겪게 되면 어떡하나,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때늦은 후회가 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단 며칠의 말미를 얻어 두었으니 차근차근 생각을 해보겠다고 작정을 하여 둔 것입니다. 마침 그날은 일곱 살짜리 작은 아이가 몸이 아프다고 칭얼대며 회사로 전화가 걸려온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잠든 것만을 보고 출근을 하느라, 아이가 아픈 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녀올 요량으로 두 시간 외출증을 끊어 회사를 나섰습니다. 빠듯한 시간 안에 볼일을 모두 보아야 했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리더라고요. 당연히 아이인 줄 알고 번호확인을 하지 않고 급히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금 가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렴...입을 떼려는 순간, 아이가 아닌 외국계 대부회사 담당자였습니다. 지점으로 언제 나올 것인지 정확한 날짜 약속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때문에, 거리가 좀 멀기도 하구요..."
딱히 가지 않겠다 거절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을 끝을 얼버무리는 저에게, 약간 답답하다는 투로 담당자 한마디를 툭 던져 놓습니다.
"지방에서도 다들 오시거든요..."
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답답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 아니냐는 듯, 목소리 속에는 한가득 비웃음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약이 조제되는 동안 아이의 손목을 그러쥔 체 기다리면서, 마음은 바쁘게 기울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회사를 나온 이때 대출신청까지 마무리를 짓고 돌아가야 한다는 쪽으로, 이제까지의 걱정들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제 멋대로 합리화를 시키며, 잠시 다녀와야 또 어떻게든 한 달이 무사히 넘어갈 것이 아닌가 변명들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열에 들떠 이마가 따스한 아이를 끌고서 낯선 버스를 탔습니다. 어쩌면 허락된 외출시간을 어길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잠시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직은 제법 이른 시간 이었던 것인지, 대출 사무실 문은 굳건하게 잠겨 있었습니다.
시내 번화가 오층 건물의 삼층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일층에는 횟집이 있어 한창 점심준비로 사람들이 분주하더군요. 이십분쯤이면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낯선 이와 통화를 끝내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서 횟집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아픈 아이를 길가 한 귀퉁이에 앉혀 주고서, 돈을 빌리겠다고 낯설고 어두운 골목에 서 있는 제 모습이란, 유리문에 적나라하게 비쳐지고 있는 몰골을 굳이 눈을 들어 보지 않아도,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횟집 유리문을 등지고서 아이의 얼굴도 바로 보지 못한 체, 어서 빨리 이 시간이 끝나가 주기만을 견디며 있었을 뿐입니다.
"고놈 참, 똘똘하게 생겼네..."
검은색 양복에 두툼한 손이 아이의 머리를 매만지느라 손목 위의 누런 금팔찌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아니건만, 전 심한 모욕감을 느낍니다. 아이의 머리가 커다란 손 안에서 흔들리고 있을 때는 공포스럽기 조차 했습니다. 아이를 좀 더 제 쪽으로 당겨 놓는 순간마저도 저는 못난 미소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좀 아파서..."
저는 웃느라 그랬겠지만, 얼굴은 한껏 일그러진 체였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아이와는 닿게 하고 싶지 않다는 어미로서의 결의가, 대출을 받기 위해 온 비굴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대출신청서를 작성하고, 통장사본을 복사하고, 구비서류를 갖추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몇몇의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 중의 한 두 명은 쓸쓸히 돌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대출 신청/접수에 관한 절차가 모두 끝이 났고, 돌아가도 좋다는 안내에 따라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대기석에는 저 또래의 한 주부가 등에는 젖먹이 아이를 업고 옆에는 네 살쯤으로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앉혀둔 체, 속이 새까맣게 타는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녀도 저도 서로를 못 본 척 했습니다. 우리 둘은 그 날 최고의 못난이들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이른 점심을 먹였습니다. 미안함에 침을 삼키는 데에도 목이 아팠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아이에게 단단히 약속을 받아둔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길었던 외출에 마음이 언짢으신 어머니를 외면하고, 우선 아이 목욕부터 시켰습니다.
따뜻한 물 안에 아이를 앉혀두고 눈을 씻기고 귀를 씻기고, 머리를 한참이나 문질러 감겼습니다. 아이를 씻기는 것으로 낮 동안 있었던 일들 전부가 지워지기라도 하듯 아이를 씻겼습니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아이에게서 씻어내고 싶은 것이 정녕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아이의 몸에서 털어 내고 남편과 이 집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원흉은 바로 내가 아닐런지...빚의 무게에 짓눌러 제대로 숨조차 쉬지를 못하고 헐떡이고 있는 제가 아니었을까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제껏 몇 년을 버티며 참아냈던 눈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 쉼없이 눈가에 물기가 맺혔습니다.
주책없는 눈물 때문에 샤워기를 흩트려 얼굴 가득 물 줄기를 뿌려 두어 아이가 모르게, 바깥에 계시는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시도록 얼굴을 닦고 또 닦았습니다. 해열제를 먹인 아이를 자리에 눕혀 두고서 집을 나섰습니다. 둔중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아이들과 남편과 어머니의 얼굴이 차례대로 보였다 사라집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될 것만 같습니다. 제가 죽어 없어지듯, 사라져 없어져 버리듯 뭔가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회사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 대신 그냥 걸었습니다. 이미 두 시간만 허락되는 외출시간이 지난지도 한참이나 되었습니다. 대부회사 직원과의 통화를 끝으로 휴대폰도 꺼버렸으니, 회사에서는 이미 한참을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편도 걱정을 하고 있을테고요. 그래도 그냥 걸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들이닥친 어려움들 마디마디, 뼈가 아프지 않는 곳이, 마음이 저리지 않는 곳이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허투로 그냥 지나가 주기만을 바라며 게으름을 부린 적도 없습니다. 어떡하든 견디고 고비를 넘겨서 잘 살아보고 싶었는데, 욕심부리지 않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아이들과 남편과 어머니 모시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여기에서 그만인가 봅니다. 이것밖에는 안되는 그릇인 모양입니다.
무책임하고 염치 또한 없는 일이지만, 이제는 더는 맞서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기운도 여력도 전부가 다 바닥이 나 버렸습니다. 알량한 목숨값으로 태산같이 무거운 빚을 대신할 수 밖에 더 이상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버스정류장에 놓여져 있는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차가 오면 뛰어들려구요. 그래서 죽을려구요. 이미 얼마쯤은 넋 조차 빠져 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 내리고, 숨은 점점 더 가팔라지더라구요.
이번에 버스가 오면, 택시가 가까이 다가오면, 아니야 커다란 화물차가 나을지도 몰라...마음 안에서 연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딘선가 어린아이가 달려가며 제 엄마를 부릅니다. "엄마, 엄마! 같이가자..." 아이와 엄마는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면서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거리며 사라져 갑니다. 설움이 숨을 꺾어 놓더라구요. 아이들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죽을 수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죽을려는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죽고 나면 아이들을 상속포기의 절차를 진행시켜 주어야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남편에게 일러두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죽어버리면, 제가 저질러놓은 빚이 고스란히 제 아이들에게 돌아간다는 무서운 사실을 그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지경이 되어 버렸는데, 제 아이들을 그만 저와 똑같은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트려 버릴 뻔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자세히 알 수 없는 이복동생 둘에게도 상속포기의 사실을 알려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닌 이번에도 저 때문에 같은 고통을 두 번씩이나 겪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입니다. 죽을 수도, 죽어서도 안 되는 이가 바로 저였던 것입니다.
눈물을 훔치고 버스정류장을 떠났습니다. 걷고 또 걸으면서 끝없이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살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끝까지 살아서 깨끗하게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축축했던 등줄기의 식은땀이 싸늘하게 식어갔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천천히 오래오래 걸었습니다.
남편에게 고백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건 절대적인 남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남편과 어머니에 의해 집에서 쫒겨나 아이들 곁을 떠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입니다. 빚을 갚고 얼마쯤 안정을 되찾고 나면 아이들은 제가 데려올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에게 사정을 하면 그쯤은 들어줄 것입니다.
회사는 그만 둘 작정입니다. 지금으로선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란, 퇴직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퇴직금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새 직장으로는 좀 더 몸을 움직여 일할 수 있는 그래서 월급이 지금보다는 많아질 식당 같은 곳으로 구하겠습니다. 차라리 몸이 고단한 것이 마음이 힘든 것보다 열배 백배는 더 견디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는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회사에 다시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으니까요. 그때가 2004년 봄이었습니다. 남편에게 도장을 찍어 달라 고백을 하던 날이요...
2008년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적금통장을 가져 보았습니다. 한 달을 벌어 순수하게 부식비와 아이들 교육비를 지출하고, 공과금을 내고, 저축을 할 수 있고, 보험에도 가입할 수 있는 날이 제게도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저에겐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으려고까지 했던 저였는데, 이제는 미래를 계획 하면서 적금에 가입씩이나 할 수가 있게 되었으니까요.
요즘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고, 웬만한 어려움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서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면역력이 길러졌습니다. 아이들과 남편과 어머니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문제만 아니라면, 전 언제나 씩씩합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각오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은 배경에는 든든한 남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몇 년 전 그때 저만의 계획대로 남편과 어머니의 손에 제가 그만 쫒겨나고 말았더라면, 제 인생 또 얼마나 열심히 꼬이고 엉켜 버렸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을테니까요.
차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저의 고백이 끝이 나고 얼마 후 남편과 전 종이 한 장위에 나란히 싸인을 했습니다. 싸인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들이 지나갔습니다.
무수한 질문들과 울분과 받아들일 수 없음과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말들이 시간 위를 지나갔습니다. 화도 많이 냈었죠. 믿으려 하지도 않았구요. 사실을 말하라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윽박지르기도 했었구요. 그런데 전 차라리 그때부터는 홀가분해졌습니다. 남편에게 다 떠넘겨버린 후에는 염치없게도 잠도 잘 잤습니다. 가위에 눌리지도 않았구요.
이제는 퇴근길에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우편함부터 뒤지며 숨길 것부터 찾아 없애 버리는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구요. 이따금씩 남편이 누군가와 통화 하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쿵 무너져 내리는 무섬증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낯선 사람들과 대금 청구서와 얄팍한 잔고의 통장들과 겨루며 견디는 것보다 남편의 증오를 감당하는 일이 저에겐 차라리 쉬웠던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만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남편과 저는 같은 종이 위에 나란히 싸인을 했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전 회사를 그만두지도 않았고, 집에서 쫒겨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싸인을 하던 그날로 저의 통장으로 천만원이라는 거금이 입금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오백만원이 그 다음날에는 삼백만원이 차례차례 입금이 되었습니다.
천 팔백만원을 가지고 우선은 2건의 카드현금서비스 돌려막기 하던 것 천삼백만원부터 정리를 했습니다. 나머지 오백만원은 다소 이자율이 높은 캐피탈쪽에서 빌려둔 신용대출건을 완납했습니다. 나머지 조금 조금씩의 대금관련 건들은 매월 월급에서 공제해 나가면 곧 깨끗하게 마무리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남편이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구요? 천만원의 거금은 남편과 저의 삼 년 남짓한 퇴직금을 중간 정산한 결과입니다. 그때가 2004년 5월쯤이었을텐데 회사의 배려로 2004년 12월까지를 계산해서 미리 지급받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백만원은 매월 삼십만 원씩 급여에서 공제하기로 하고 가불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십육개월을 삼십만원씩 공제하고 십칠개월째에는 이십만원을 공제하여 가불금 오백만원을 전액 상환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무이자 대출이었던 것입니다. 나머지 삼백만원은 남편의 명의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여 제게 쥐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주윗 분의 도움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도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자느라 몰랐는데, 밤 시간을 이용해서 많은 분들이 일을 하고 계시더라구요. 그저 우편함에 꽂혀져 있었기에 우편으로 도착하는 줄로만 알았던 광고책자의 발송업무가 바로 새벽과 아침을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것 이었습니다. 새벽에 하는 업무란 신문과 우유배달업이 전부인줄로만 알았던 저에겐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새벽 세시쯤에 시작해서 여섯시가 넘는 시각이면 끝이 나는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육 십 만원 남짓이었습니다. 저의 노동을 담보로 가불한 금액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금액이라 욕심껏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다음날 회사 일에 지장을 줄까 걱정이 되어 온통 긴장하고 마음을 쓰는 바람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으나, 수입 때문에 그랬던지 곧 적응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대신 퇴근하고 집으로 가서는 집안일을 대충 끝내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건강관리를 했습니다.
마냥 오래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아니었기 때문에 당분간, 우선 가불한 급여를 공제하는 기간 동안 만이라도 보충할 수 있도록 하도록 하자...목표를 세워둔 후 일을 시작했고, 공제기간이 끝이 나면서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습니다.
남편의 무조건적인 이해와 용서도 고마웠지만, 회사의 파격적인 배려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결혼 전 삼년 남짓 근무한 인연으로 결혼하고 칠 년만의 복직을 승인해 준 것만으로도, 그것도 남편과 함께 입사를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제 빚의 대부분이 회사의 운영자금에서 빠져 나온 것이고 보면, 어떻게 제가 이 고마움을 잊을 수가 있을까요! 단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쫒아내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스스로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주는 남편과, 무조건 믿어주고 베풀어 주는 회사 덕분으로 오늘도 저 아이들 곁에서 엄마 노릇하며 웃으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2005년 여름이 지나가면서 매월 급여에서 공제하던 삼십만원이 모여 오백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급여도 제대로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빚과의 전쟁이 끝이 난 것입니다.
끔찍한 칠년여의 시간을 살아내고 난 후, 전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 보증은 서주지도, 서달라 부탁하지도 않는다는 삶의 철칙을 세워 두었습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부자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 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일확천금의 대박은 꿈꾸지도 바라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한 개미가 되려 합니다.
얼마 전 아는 분이 아주 좋은 투자꺼리가 있다며 살짝 유혹의 손짓을 제게 하셨어요. 얼마간의 목돈을 투자하면 매일 일정액의 금액이 통장으로 입금이 된다는... 투자를 모아서 대한민국 곳곳의 병원 등에 노트북을 지급하고, 환자들이 그 노트북을 사용하는 이용료가 투자자 계좌에 입금이 된다는...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는데, 제 주위에서 몇몇 분들은 귀가 솔깃하신지 현금서비스 받고, 적금 해약하고 해서 투자를 하시더라구요. 그 틈에 하마터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 한 분을 잃어버릴 뻔 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업에 동참하지 않았거든요. 겁이 났어요.
그럴리도 없겠지만, 이제는 누가 큰 돈을 준다 해도 반갑지도 귀가 솔직하지도 않습니다. 돈 때문에 삶 자체를 망칠 뻔하였는데, 또 돈에 관한 일로 엮여들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설사 그 일이 정말 대박이 나고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살면서 가장 무서운 건 빚이라고, 갚아야 할 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있고, 가족끼리 빙 둘러 앉아 구워 먹기위한 삼겹살을 살 돈이 주머니에 들어 있다면 그것이면 행복할 것입니다. 거기에다 소주라도 한 병 곁들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의 삶이 되겠지요. 가지면 좋지만 갖지 않아도 삶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이라면, 갖지 않으면 그 뿐입니다.
돈은 잃어도 살 수 있고, 없어도 살 수는 있지만,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잃어도 안되고 헤어지고서도 예전처럼 행복하게 마냥 웃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까요.
그것을 알았습니다.
돈보다 멋지고, 좋은 많은 것들보다 귀하고 귀한 건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구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