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짬을 내 들른 프랑스 파리에서 유로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꼈다. 에펠탑을 비롯해 관광명소엔 변함없이 사람이 들끓었지만 화려한 쇼핑무드는 찾기 힘들었다. 약(弱)통화국 사람으로서 돈 쓰기가 부담스러웠다. 지하철만 해도 1구간 2유로70센트, 한화 약 4000원이다. 서울지하철의 4배 수준인데 4인가족이 타니 1만6000원으로 한국의 장거리 택시값이 됐다. 정직하게 4장을 끊어 개찰구로 들어가는데 우리 가족 뒤로 무임승차자가 우르르 붙어들어왔다.
개찰구에 한국처럼 지키는 사람도 없고 나갈 때는 표를 반환하지 않고 그냥 나가기 때문에 돈을 내고 타는 사람이 바보였다. 차라리 지키는 사람을 고용해서 무임승차를 막으면 고용을 늘리고 요금도 더 내릴 수 있어 일거양득인데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질 않으니 악순환일 것이 뻔하다. 무임승차가 많으니 적자가 날 것이고 보충하기 위해 요금을 더 올려야 할 것이다. 무임승차자를 잡는 건 야박한 짓이라는 여론 때문에 놔둔다는 설도 있다.
결국 나랏돈이 새는 것이고 성장잠재력을 깎는 일이다. 프랑스는 올 2월 신용평가사 S&P로부터 AAA등급을 AA+로 강등당했다. 프랑스 재정적자는 경제규모 대비 6%가 넘는다. 그것을 줄이기 위해 먼저 손을 대야할 공기업부터 방치되고 있으니 효율성과 성장력을 높이는 일에 밀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유로존의 위기해법 성공 여부에 끊임없이 회의의 시선을 보낸다. 성장잠재력 확충 없이 증세하고 재정지출만 줄여봤자 경기는 더 침체되고 결국 세수감소로 부메랑이 될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유로존의 진정한 위기는 '성장위기'다. 성장해서 세수가 늘면 적자를 왜 걱정하나. 유로존 가입 후 이탈리아는 성장률 제로다. 당장 재정적자보다 이게 더 큰 문제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나라에선 성장이 정책에서 금기어가 됐다. 19대 총선을 앞둔 정치권 공약만 봐도 '복지'가 대강을 차지한다. 여야할 것 없이 복지공약을 쏟아내다보니 보수·진보 구분도 없다. 과거 진보의 전유물이었던 경제민주화에도 새누리당이 발을 담갔다. 민주통합당은 자기 계산으로도 30조원이나 돈을 써야 하는 거대한 복지공약을 내걸었다.
경제력 집중 억제 테마가 살아나오고 진보진영에선 재벌해체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자리문제는 경제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접근한다. 4년 전 18대 총선에서 여야가 각각 '기업하기 좋은 나라' '성장률 6%' 공약을 내건 것과 대조되는 분위기다.
돈을 팍팍 풀어야 경제가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옛날 방식이다. 미국·일본·유럽 할 것이 돈은 무한대로 풀렸지만 성장이 빈곤하다. 돈을 풀지 않아도 포인트를 잘 잡으면 성장할 수 있다. 고성장하는 중국·동남아시장이 곁에 있다. 정보기술에서 앞서간다지만 국산화해야 할 부품도 수두룩하다. 또 명동에 중국·일본관광객이 득실거리게 하는 한류는 얼마나 기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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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국 1위 기업 삼성전자가 순이익 1조원을 싹둑 잘라 벤처펀드를 만들고 투자한다면 어떨까. 그래서 자회사를 만들어 수입에 의존하는 부품 국산화에 나서고 유망 중소·벤처기업에 지분투자 형식으로 수십·수백 군데에 뿌려주면? 그 경제효과는 말할 수 없이 클 것으로 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테마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라 '말이 되는 소리'로 취급될지 의문이다.
1998년, 2008년 양대 위기를 거치며 한국사회는 너무 갈라졌다. 메우기 위해 복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가치에 제어되지 않는 복지는 벼랑으로 가는 기관차일 뿐이다.
문제가 100이 있을 때 성장이 있으면 50%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성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