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세월호 참사 1년, 우리는 무엇을 '징비'하였나

[광화문]세월호 참사 1년, 우리는 무엇을 '징비'하였나

송정렬 부장
2015.04.16 14:56

#1592년 4월 30일 새벽. 임금의 가마가 서쪽으로 이동했다. 경복궁 앞을 지날 때 시가지 양쪽에서 곡성이 계속 들렸다. 돈의문을 나와 사현에 도착할 즈음 동이 텄다. 성안을 돌아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 불길이 일어나 연기와 화염이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사현을 넘어 석교에 이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징비록’중에서)

TV드라마 ‘징비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말자며 아픈 기억들을 꼽씹으며 써내려간 기록이다. ‘징비’는 '시경'에 나오는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候患, 내가 징계하노니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징비록을 읽으려면 인내를 각오해야한다. 순간순간 답답함에 울화통이 터져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침략은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참혹한 재앙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지만, 조선은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이를 대비를 하기 보다는 철저히 외면했다.

심지어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이렇다보니 전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열흘 만에 도성을 적에게 내주는 수모를 당해야했다. 그리고 임금은 새벽을 틈타 줄행랑을 쳤다.

이처럼 절절한 자기반성을 담아 징비록을 남겼지만, 결과론적으로 유성룡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조선은 불과 30여년 만에 다시 후금(청나라)에 강토를 유린당했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했다. 더 나아가 조선 말기에는 다시금 일제에 강점돼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2014년 4월 16일. 인천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중심을 잃고 기울며 침몰했다. 국민들은 TV방송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그 장면들을 지켜봐야했다. 슬퍼했고, 분노했지만, 295명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중 246명은 삶을 꽃피워보지도 못한 어린 단원고 학생들이었다. 9명은 아직도 어둡고 차가운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민국 전체가 슬퍼했고, 정부는 국가개조를 선언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만성적인 안전불감증은 여전하다. 지하철이 추돌하고, 건물이 붕괴되는 등 어처구니없는 사고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1년 세월호 참사라는 커다란 슬픔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반성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무엇을 경계했던가. 진상규명부터 세월호특별법, 선체인양까지 어느 것 하나 다수의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해결된 것이 없다. 고작 어린 학생들의 목숨 값이 얼마라는 알량한 셈법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진도 팽목항과 안산, 서울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지난 1년간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은 또 한 번 울부짖었다.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 세 번째로 팽목항을 찾았다. 수백명의 경호인력들을 대동하고서다. 그 든든한 벽에 가로막혀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위로도 없었다. 대통령은 알맹이 없는 대국민메시지를 발표하고 자리를 떴다.

오늘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고 콜럼비아로 떠난다. 지금 대한민국엔 눈물같은 비가 내린다. 우리의 마음속 세월호는 아직도 침몰중이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