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때부터 (경기도) 서쪽의 길로 사람과 물자가 통행할 수 있게 돼 (남쪽의) 여러 의병이 차례로 경기지역에 진출해 주둔하면서 명나라의 군대를 기다렸다.'
선조수정실록에 1259년 12월1일 기록된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에 대한 평가다. 평양에서 후퇴한 6만명의 왜군이 서울에 주둔했고 명나라군이 남하하며 서울의 왜군을 압박했다. 남쪽의 조선군이 북상해 협공할 수 있는 형세를 갖춘다면 왜군에는 최악이었기에 왜군은 2만명의 군사를 동원해 서울 남쪽 수원·용인 등의 길을 막고 있었다. 독성산성 전투의 승리로 조선군이 북상할 수 있는 길을 뚫어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으니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너무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전투장소로 독성산성을 택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잘 헤아리지 않는다. 국가유산청의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설명문에 이런 문구가 있다.
'세마대의 전설이 있는데 권율 장군이 산 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독성산성은 독성산(207m) 정상을 둘러싸며 성벽을 축조한 둘레 1100m의 테뫼식 중형 산성이다. 우리나라 고대의 모든 고을에 하나씩 있던 통치성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수원 고을의 통치성이었다. 중소형의 단기전에서 높은 방어력을 갖도록 급경사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면서 장기전에 필수적인 물이 있는 샘과 골짜기를 포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강한 적의 장기 포위전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고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선 방어장소로 선택하기 어렵다.
2만명의 왜군이 독성산성에 주둔한 1만명의 조선군을 장기포위하는 전략을 택한다면 물이 없어 항복하거나 성문을 열고 나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2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후자를 선택했다고 해도 당시 왜군의 전투력이 조선군보다 높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승리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권율 장군은 독성산성을 택했고 물이 부족한 단점을 속임수로 극복하는 세마대의 전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면 권율 장군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독성산성 전투 이전에 왜군과 정면으로 맞선 육상의 대규모 전투가 충주, 용인, 금산에서 있었고 모두 대패했다.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지형을 이용해 방어한 웅치전투에선 패했지만 왜구에도 큰 피해를 입혀 더이상의 진군을 막았고 권율 장군이 직접 참전한 이치전투에선 승리했다. 정면으로 맞선 전투에서 대패는 왜군의 전투력이 조선군보다 높다는 것을 몰랐거나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라는 지형을 이용한 방어는 적보다 전투력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있을 때 가능하다. 권율 장군은 이런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기에 독성산성을 과감하게 방어거점으로 택했다.
그런데 이런 용기만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군이 장기 포위전을 감행했다면 대패로 가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역사의 조롱거리가 됐을 것이다. 권율 장군은 첫째, 왜군은 대규모 명나라군의 남하를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고 둘째, 식량과 탄환 등의 보급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어 장기 포위전을 감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독성산성 전투는 왜군을 대파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뚫어 명나라군과 협공하는 형세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왜군과의 전투를 최대한 피하면서 철수하게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 거기엔 현재의 전력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줄 아는 권율 장군의 진정한 용기와 전체 형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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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은 요즘 아군의 역량과 전체 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전제로 전투에 임해 최선의 결과를 끌어낸 권율 장군의 독성산성 전투를 한 번쯤 되돌아볼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