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불확실성 시대,유동성 확보는 생존의 필수조건

[투데이 窓]불확실성 시대,유동성 확보는 생존의 필수조건

반영은 휴맥스해운항공 대표
2026.04.22 02:00

흔히 위기는 재무제표의 적자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의 많은 파산은 적자가 아니라 유동성 부족에서 시작된다. 장부상 흑자인 기업도 당장 갚을 돈이 없으면 쓰러진다. 강남에 몇 십억 부동산을 소유한 가계도 현금 흐름이 부족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외화 유동성은 곧 국가 신뢰의 문제다. 숫자는 흑자인데 문은 닫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한국이 맞닥뜨린 것도 결국 달러 유동성의 고갈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는 한국이 1997년 11월 사실상 지급불능의 상태였다고 판단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도 본질은 비슷했다. 장기채권 평가손실, 취약한 예금 구조, 모바일 시대의 빠른 인출이 겹치자 은행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위기는 늘 복잡한 원인으로 오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지금 당장 현금이 있느냐'는 단순한 문제를 풀지못하기 때문에 터진다. 금리가 오를 때 신용위험보다 먼저 터지는 것도 대개 자금조달 경색이다. 그래서 위기 국면의 핵심은 손익계산서보다 현금흐름표에 있다.

2018년 필자가 산업은행 뉴욕지점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뉴욕 연방준비은행(NY FED)과 뉴욕주 금융감독원(NYDFS)으로부터 매년 감사를 받고 있었는데, 핵심 항목 중 하나가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이었다. LCR은 향후 30일간 예상되는 순 현금 유출액 대비 즉시 현금화 가능한 '고유동성 자산'의 비중을 측정하는 지표이다. 이 비율이 높을수록 예상치 못한 뱅크런 사태에도 은행은 안정적인 방어막을 갖게 된다. 그런데 뉴욕감독당국의 감사 자료를 점검하던 나의 시선을 고정시킨 항목이 있었다. 비상용으로 보유하던 매각가능 채권 상당 부분이 한국전력, 포스코 등 한국계 기업 채권과 한국 국채였다. 평시에는 안전해 보이는 자산이다. 하지만 남북 긴장이 고조되어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계 자산에 등을 돌리는 상황이 온다면 정작 유동성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이 채권들이 제값에 팔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유동성 자산이 실제로는 비유동성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었다. 신속하게 포트폴리오 구성을 바꾸었고, 이 선제적 조치는 실제 감사 과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 중동 전쟁이 보여준 것도 같다. 원유는 금융자산이 아니지만 유사시 국가가 멈추지 않게 하는 전략 비축자산이라는 점에서 '실물 유동성'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가와 성장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외환시장과 자금시장도 함께 요동친다. 한국은행이 최근 통화정책 결정문에서 중동 전쟁이 금융·외환시장의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고 짚은 이유다. 에너지 안보와 외화 유동성, 금융 안정은 따로 떨어진 주제가 아니다. 비상시 원유 저장시설과 조달선이 왜 국가 신용의 일부인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가계·기업·정부가 챙겨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가계는 집값이 오르는가가 아니라 몇 달을 버틸 현금이 있는가? 기업은 수주가 늘었는가가 아니라 단기차입 만기가 한꺼번에 몰려 있지 않은가? 정부는 외환보유액의 절대 규모가 큰가가 아니라 충격 시 실제로 동원 가능한 안전판이 충분한가? 유동성 관리는 보수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지만, 위기가 오면 그 보수성이 조직을 살린다.

유동성 확보에는 비용이 든다. 현금과 비상자산을 쌓아두면 수익률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유동성은 보험과 같다. 가계에는 생활비 몇 달치의 현금성 자산이, 기업에는 차입구조와 만기 분산이, 정부에는 충분한 외환과 에너지 등 필수 자산의 비축이 필요하다. 위기는 처음에는 천천히 오지만 어느 순간 쓰나미처럼 몰아친다. 그래서 평소에 준비된 유동성은 수익률을 깎는 자산이 아니라 생존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다. 경제의 세 주체가 지금 다시 유동성을 점검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큰 시대에는 유동성 확보 능력이 국가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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