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체제와 97체제의 충돌, 27체제로 넘어가야[청계광장/이정식]

87체제와 97체제의 충돌, 27체제로 넘어가야[청계광장/이정식]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2026.05.20 02:00

87년 노동자대투쟁 대기업노조 힘세져
97년 외환위기 정리해고,비정규직 확산
연대·책임,공정 배분 새 노사관계 절실

460만 주주, 1,700여 협력사, 수만 명의 하청 노동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삼성전자 노사의 협상이 끝내 타결되지 않을 경우 예고된 총파업에 대해 정부가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사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기업 분쟁을 넘어, 한국 노사관계가 어떤 체제로 전환할 것인가를 묻는 분기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두 체제를 살아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문을 연 87체제는 기업별 노조 중심의 각개약진 구조를 형성했다. 그 결과 대기업 정규직은 강한 협상력을 확보했지만, 중소기업·비정규직·하청 노동자는 제도적 보호의 바깥에 남겨졌다. 1997년 외환위기가 낳은 97체제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다단계 하청 구조를 통해 기업의 위험을 외부로 이전하고 이익은 내부에 축적하는 이중구조를 고착화했다. 그 결과 오늘날 청년 일자리 문제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 대기업 일자리 비중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크게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오늘의 삼성전자 노조는 87체제의 언어로 요구하고, 사측은 97체제의 논리로 대응한다. 그러나 두 체제 모두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이번 갈등의 쟁점도 비교적 분명하다. 성과급 갈등의 본질은 단순한 금액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정 기준의 불투명성과 정보 비대칭에서 비롯된 신뢰의 문제다. 경쟁 기업이 성과급 체계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온 점을 고려하면, 삼성전자 역시 이 문제를 장기간 방치해온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동자들의 요구에는 정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고정적으로 배분하라는 요구는 경기 변동과 미래 투자, 연구개발, 고용 계획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성과 공유는 필요하지만, 변동성과 장기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려하는 설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파업의 합법성이 정당성 보장의 충분조건이 아니듯, 경영 역시 신뢰 회복을 위한 투명성과 설명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함께 키운다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노사 양측 모두에게 지금 필요하다.

노사관계의 사법화 경향도 심각하다. 쟁의행위에 대한 가처분, 노조 내부 분쟁까지 법정으로 향하는 현실은 자율적 해결 기능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원 판결은 갈등을 일시 멈출 수 있어도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긴급조정권 역시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극히 제한적으로만 발동된 이 예외적 장치는 갈등을 잠시 중단시킬 수 있어도, 그 뿌리인 불신과 이해 충돌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제도의 권위는 남용이 아니라 절제에서 나온다. 과거 긴급조정권 발동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한 것은 발동 여부가 아니라, 그러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은 구조를 만드는 데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이제는 27체제를 설계해야 한다. 이는 선언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첫째, 기업 단위를 넘어선 교섭과 협의의 틀을 확장해 대기업 정규직의 협상력이 하청·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원청의 실질적 지배력에 상응하는 책임을 명확히 하는 기준과 제도적 장치를 정립해야 한다. 셋째, 성과공유는 고정 비율이 아니라 기업의 이익 변동과 투자계획을 반영하는 중장기 연동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나아가 반도체 등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상시적 노사정 협의·조정 체계를 구축해 대규모 분쟁을 사전에 관리할 필요가 있다.

AI와 자동화, 인구 감소,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일자리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단기 분배와 기업 단위 이해에 머무는 기존 노사관계로는 이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우리는 87체제와 97체제의 충돌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연대와 책임, 공정한 배분이 작동하는 27체제로의 전환을 지금 시작할 것인가. 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한국 경제와 노동의 지속가능성을 가르는 분기점이다.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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