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도입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제
대표 선출·임기·활동·권한 등 안정해져
혼란 피하려면 세부 기준 법에 명시해야
유연근로제 하나를 도입하려 해도 기업은 먼저 묻는다. "누구와 합의해야 뒤탈이 없는가." 이 단순한 질문에 우리 노동법은 아직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한다. 주 4.5일제와 실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본격화될수록 이 질문은 더 무거워진다. 근로시간을 줄이면서 생산성을 지키려면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 같은 유연한 제도를 함께 써야 하고, 그 관문이 바로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이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이 근로시간제도 등에서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를 제도화한 것은 1997년이다. 과반수 노조가 있으면 노조가, 없으면 근로자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가 그 역할을 맡는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과반수 동의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뼈대 위에서, 근로시간 배치처럼 수시로 조율이 필요한 사안은 대표를 통해 합의하도록 한 것이다. 근로자 10명 중 9명 가까이가 노조 밖에 있는 현실에서 무노조 사업장에도 최소한의 집단적 자치 통로를 열어두려는 취지였다.
문제는 설계다. 첫째, 법은 근로자대표가 누구인지는 정했지만 어떻게 뽑는지, 임기는 얼마인지, 대표 활동은 어떻게 보호하는지는 정하지 않았다. 사용자가 사실상 지정한 대표와 맺은 합의가 법정다툼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피해는 노사 모두에게 돌아간다. 근로자는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 대표에게 근로조건을 맡기게 되고, 기업은 선의로 맺은 합의가 뒤집힐 불확실성을 떠안는다.
둘째, 대표 개념이 법률마다 흩어져 있다. 근로기준법의 근로자대표, 근로자참여법의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 노조법의 노동조합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근로자위원이 당연히 근로자대표의 권한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고 제도를 운영했다가, 별도의 선출·위임 절차가 없었다는 이유로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같은 사업장 안에서도 어떤 합의는 노사협의회가, 어떤 합의는 별도로 선출·위임된 대표가 맺는 혼란스러운 구조가 생기고, 그 경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노무 전문가뿐이다.
셋째, 일하는 방식은 다양해졌는데 대표성은 획일적이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은 판례가 적용 대상 근로자 집단의 동의를 기준으로 삼아 왔지만, 근로자대표 제도는 특정 직군에만 적용되는 사안에서 누구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지 정하지 않았다. 개발직에만 적용할 근로시간제를 생산직 다수가 좌우하거나, 비정규직과 소수 직군의 목소리가 전체 과반수에 묻힐 수 있다.
2020년 10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논의 등을 거치며, 아울러 근로자 선택권 확대를 뒷받침하는 제도로서 근로자대표제 정비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근로시간 개편 논란 속에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근로자가 믿을 수 있는 대표 없이 유연화를 말하면 그 제도는 '사용자 편의'로 읽힐 수밖에 없다. 유연화와 대표제 정비는 한 묶음이어야 하며, 순서로 보면 대표제 정비가 먼저다.
해법은 법 개정이다. 근로자대표의 직접·비밀·무기명 선출, 임기, 불이익 취급 금지, 정보접근권 등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 다행히 현행 근로자참여법은 과반수 노조가 없는 사업장의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을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뽑도록 하고 있다. 노사협의회 설치 의무가 있는 3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선출 때 그 권한을 고지하고 근로자위원이 근로자대표를 겸하도록 연계하면 된다. 30인 미만 사업장에는 간이 선출 절차를 두어 영세 사업장의 부담을 덜어야 한다. 특정 직군에만 적용되는 사안은 해당 집단 과반수의 의사를 추가로 확인하도록 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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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는 노사협의회 강화가 노조를 대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 구상은 과반수 노조의 지위와 단체교섭권을 건드리지 않는다. 노조가 닿지 않는 곳에 대화 통로를 만드는 보완 장치다. 대표를 직접 뽑는 과정 자체가 근로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조직하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제도의 빈칸을 판례와 행정해석으로 메워 온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근로시간을 둘러싼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대표성의 중요성도 커진다. 유연성과 보호는 대립하지 않는다. 둘을 잇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대화 상대다. 그 상대를 법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