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 농단 실체가 드러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다. 고향에 계신 칠순의 집안 어르신과 통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최 씨가 화제에 올랐다. 다른 경상도 어르신들처럼 이 분도 박근혜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셨다. 지난 대선부터, 또 이번 정부 출범 이후 박 대통령이 여러 곡절을 겪는 동안에도 믿음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도 이번엔 무척 당혹스러워 하셨다. 그렇게 믿었던 대통령이 각종 의혹에 휘말리고, 헌정을 유린한 최악의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는 상황이 됐으니 그렇지 않은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비판의 화살은 주로 최 씨에 집중됐다. 대통령을 속여서 자기 잇속을 챙기고 나라를 망친 최 씨를 당장 잡아와야 한다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통령에 대해선 일말의 동정심이 남아있는 듯 했다.
통화 말미에 “그런 농간에 휘둘렸다면 그 자체로도 대통령으로서 자격 미달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우리가 그런 것(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관계)까지 어떻게 알고 투표를 하누”라며 답답한 듯, 한마디가 돌아왔다.
마지막 얘기가 귀에 박혔다.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10년 이상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함께 권력을 누렸던 측근 실세들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하는 판인데, 국민들이 검증되지 않은 하자까지 알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친박(친 박근혜)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 언론 등의 책임이 크다.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로 정치에 입문한 1998년 이후 두 번의 대선에 나가는 등 충분한 검증 무대가 있었지만 걸러지지 못했다. 최순실의 영향력, 비선에 대한 과도한 의존, 과거사 등은 일방적인 의혹 제기 이상 다뤄지지 못했다.
특히 측근 친박 그룹들의 정치적, 도의적 책임이 크다. 최순실과 관련해 누구보다 진실에 가까이 있었던 이들이다. 몰랐다고 해도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외면했다면 정치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자신이 믿고 따랐고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강요하기까지 했던 리더의 하자가 드러나고 그것이 국가와 국민에 큰 해를 끼쳤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게 도리다.
책임소재를 묻는 것과 함께 우리 유권자들로선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소통하지 않고, 독선적이고, 불투명한 리더십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며 목격하고 있다. ‘문고리 3인방’으로 대변되는 박 대통령의 불투명하고 제한적인 소통 방식이 용인됐기 때문에 최 씨의 국정농단이 이렇게 오랜 세월 국정 전반에 파고들 수 있었다.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여도, 권력은 끊임없이 견제 받고 검증돼야 한다.
지난 주말 100만 촛불이 보여준 민심은 새로운 리더의 등장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하더라도 이번엔 정말 제대로 뽑아야 한다. 그래야 이 아픔을 딛고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 첫 걸음은 불통, 독선, 불투명한 리더십에 낙제점을 매기는 것부터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