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내 이름…어느새 익숙해진 'OO 아버님'[40육휴]

사라진 내 이름…어느새 익숙해진 'OO 아버님'[40육휴]

최우영 기자
2025.11.08 08:30

[40대 아빠의 육아휴직기] < 37주차 > 아이 중심으로 재편되는 사회적 관계

[편집자주] 건강은 꺾이고 커리어는 절정에 이른다는 40대, 갓난아이를 위해 1년간 일손을 놓기로 한 아저씨의 이야기. 육아휴직에 들어가길 주저하는 또래 아빠들의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이 나를 '아버님'이라고 불러준 지 1년 반쯤 된 요즘. 이제 아이도 '아빠' 소리를 하며 외출했다 돌아오는 아빠에게 달려든다. /사진=최우영 기자
세상이 나를 '아버님'이라고 불러준 지 1년 반쯤 된 요즘. 이제 아이도 '아빠' 소리를 하며 외출했다 돌아오는 아빠에게 달려든다. /사진=최우영 기자

아이 출산 소식을 친구들에게 알렸을 때 이미 아이를 키우는 이들이 축하 못지않게 많이 해줬던 말이 있다.

"이제 네 이름은 없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몰랐다. 아이가 생기니 사람들이 편하게 'OO 아버님'이라고 부른다는 정도로만 이해했다. 아이와 함께 생활한 지 15개월이 지난 요즘에서야 당시 애 아빠들의 말뜻을 알아차리게 됐다.

잊혀가는 호칭 '최서방' '최기자'
지난해 7월 "네 이름은 이제 없다"던 애 아빠들의 예언이 현실이 되고 있다. /사진=최우영 기자
지난해 7월 "네 이름은 이제 없다"던 애 아빠들의 예언이 현실이 되고 있다. /사진=최우영 기자

처음 아버님 소리를 들은 건 산부인과였다. 그때는 꼭 아빠가 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기에 오히려 '아버님'이라 불러주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 부산의 유명한 작명소 원장과 통화할 때도 아무런 감흥 없이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 산후조리원, 소아과, 어린이집을 거치면서 뭔가 느낌이 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은 오직 아이에 꽂혀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이름은 처음에 인적사항을 적을 때 외에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어느새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기본값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육아휴직을 하며 업무와 잠시 단절된 탓만은 아니었다. 평상시 '최서방'이나 '자네'로 불리던 공간에서도 'OO 애비'가 됐다. 항상 이름을 불러주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나는 아이의 조력자 내지는 주변부 인물이 됐다. 옛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차인표가 안재욱의 인기에 밀리다 나중에 조연으로 전락했던 심정이 이랬을까.

기자보다 어깨 무거운 아빠 역할
최고스타 차인표를 단숨에 조연으로 전락시킨 안재욱의 'Forever'. 요즘 내 인생의 강력한 주연으로 급부상한 딸아이의 위력은 리즈 시절 안재욱보다 훨씬 강력하다. /사진=KBS '별은 내 가슴에' 캡처
최고스타 차인표를 단숨에 조연으로 전락시킨 안재욱의 'Forever'. 요즘 내 인생의 강력한 주연으로 급부상한 딸아이의 위력은 리즈 시절 안재욱보다 훨씬 강력하다. /사진=KBS '별은 내 가슴에' 캡처

비록 관심도는 조연이나 그보다 더 인기 없는 엑스트라로 전락했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줄어들진 않는다. 오히려 아빠로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늘어난다. 최기자는 일이 많으면 팀원, 부서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 아이의 아빠 역할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가끔 병원에 다녀오는 일 정도는 장모님이 도와줄 때도 있다. 그런데 도저히 대체자를 구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최근에 있었던 생애 첫 '학부모 면담'이 그랬다. 상담 날짜를 잡으라는 어린이집 공지사항을 볼 때부터 가슴이 울렁거렸다. 회사에서 부장, 국장과 면담할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OO 아버님'으로 데뷔한다는 건 압박감이 달랐다.

그리 길지 않은 면담 시간이었지만 대화 내용을 한땀 한땀 적고 또 적었다. 알림장 앱으로 "내일 물티슈랑 여벌옷 챙겨주세요"라는 당부를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면담을 끝내고 나온 뒤 온 몸에서는 땀으로 홍수가 났다.

며칠 전 집에서 단둘이 놀던 아이가 다쳤을 때도 땀으로 흠뻑 젖긴 했다. 창틀에 부딪혀 터진 아이 입술에서 너무 많은 피가 났다. 소아과 마감 시간까지 40분이 남았는데 차도 쓸 수 없는 상황에 앱으로 예약할 겨를도 없었다. 지혈을 마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20여분을 달려 겨우 진료를 받았다. 땀으로 젖은 몸은 돌아오는 길에 찬 바람과 만나며 고스란히 감기로 돌아왔지만, 그저 아이 입술을 치료해 다행이라는 안도감만 남았다.

부부끼리도 "OO 엄마" "OO 아빠" 부르는 이유
아빠로서 할 일이 참 많다. 그 중 하나는 아이의 베개 역할이다. /사진=최우영 기자
아빠로서 할 일이 참 많다. 그 중 하나는 아이의 베개 역할이다. /사진=최우영 기자

예전에 미국 등 서구권의 드라마를 보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부부끼리 서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었다. 부부간에도 주로 'OO 엄마' 'OO 아빠'로 부르던 데 익숙한 한국인인 나에게는 꽤나 생소한 장면이었다. 심지어 부모님 세대에서는 '여보' '자기' 소리도 별로 들은 적이 없다.

관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의 차이였을까. 동양권에선 아이라는 가족 구성원이 더해지면서 부부 모두 아빠와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강력하게 만들어진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호칭을 통해 서로가 가진 부모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둘만의 관계가 이젠 육아의 파트너 관계로 변화했다는 걸 자각한다. 개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성인이 되자마자 자녀를 집에서 내보내는 미국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역할 자각'은 집 밖에서도 이어진다. 병원이나 어린이집을 방문하는 나는 더 이상 단순한 개인 고객이 아니다. 집에서, 소아과에서, 어린이집에서 끊임없이 듣는 '아버님' 호칭을 통해 아직 보호가 필요한 아이의 보호자이자 책임자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사람은 자신이 기대 받는 만큼 성장한다는 걸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르던가. 이 '아버님' 호칭은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라는 가족과 사회의 지속적인 기대라고 여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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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영 기자

40 넘은 나이에 첫 아이를 얻었습니다. 육아휴직을 하며 그 경험을 나누기 위해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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