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록 부장판사 주도 '증권법연구반' 참관기
"하루가 다르게 복잡해지고 있는 파생상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상품 설계자 뿐입니다. 판매자도 잘 모르는 상품을 투자자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금융회사는 수익성만 쫓지 말고 투자자가 원금 손실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금융회사 스스로 자본시장을 키워간다는 자부심을 갖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승록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지난 25일 낮 12시30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14층 소회의실. 몇몇 판사들이 자리를 잡더니 소회의실이 금새 꽉 찼다. 이날은 1주일에 한 차례 점심 시간을 쪼개 1시간 가량 진행되는 판사들의 연구 모임인 '증권법연구반'이 열리는 날이다. 15명이 모이자 최승록 부장판사(60·사법연수원 20기·사진)의 주제 발표가 시작됐다.
이 모임을 이끌고 있는 최 부장판사는 최근 키코 관련 소송에서 처음으로 금융회사가 아닌 기업의 손을 들어줘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엠텍비젼 테크윙 등 4개 기업이 씨티은행과 하나은행 등을 상대로 낸 키코 소송에서 피해액의 60~70%를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키코라는 파생금융상품이 은행보다 기업에 더 큰 피해가 가도록 구조상 문제가 있고, 키코를 설계해 판매하고 권유한 곳이 은행이어서 은행들이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136여억원을 물어주게 됐다. 이런 결정이 나오도록 산파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증권반 모임이다.
이날 주제는 '집합투자상품(펀드)의 투자권유 단계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었다. 최 부장판사는 "영국 금융감독원(FSA)의 경우 '적합성 원칙'을 강조하고, 홍콩에서는 투자자에게 반드시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지하도록 하고 있다"며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이를 소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적합성 원칙이란 금융회사가 투자자의 특성에 고려해 투자를 권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투자자의 투자목적, 재산상태, 투자위험에 대한 태도를 감안해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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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모임에서는 적합성 원칙의 근거로, 한 금융회사가 998명의 투자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가 인용됐다. 투자자 자신은 본인을 안정형, 안정추구형이라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는 위험중립형인 경우가 39.2%에 달했다. 곧 투자 성향 조차 투자자가 인지하는 것이 실제와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최 부장판사는 "아직 진행 중인 키코 소송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으나 금융회사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융투자회사들이 자신을 단순한 영업기관이 아닌 자본시장의 톱니바퀴와 창구로 인식해야 한다"며 "금융회사들에게 공무원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신의가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그가 증권, 파생상품 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9년부터 올 초까지 3년간 증권사들이 밀집된 여의도를 관할하는 서울남부지방법원에 근무하면서부터다. 상장폐지, 손해배상 등 수많은 증권 관련 소송을 처리하면서 처음에는 법조항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법과 실물경제가 괴리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이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필요를 느꼈다고 했다.
특히 2009년 자본시장법이 시행되면서 판사 중에서 증권법을 제대로 이해하겠다는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증권법연구반을 발족시켰다. 법원 내 증권사건 담당 판사들이 재판 때 활용할 수 있는 매뉴얼인 '재판실무지침서'도 직접 썼다.
증권법연구반은 올 2월 그가 서울중앙지법으로 이동하고서도 이어져 현재 서울중앙지법에만 회원이 20명에 이른다. 마약사건을 담당하는 젊은 여성 판사도 짬을 내 참여할 정도로 증권법에 대한 관심이 높다.
연구반은 단순한 스터디 모임이 아니다. 금융투자협회나 한국거래소 등 증권기관 관계자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고 실무감각을 익히려고 노력한다. 최 부장판사도 직접 거래소를 수차례 방문했다. 교과서적 판단에서 벗어나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이전에 금융하면 은행이나 보험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증권이 자본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도 증권투자를 투기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많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투자로 일정 수익을 얻으려는 투자자를 일확천금을 노리는 야바위꾼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일하고 월급 받는 것처럼 당연한 경제활동으로 여겨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최 부장판사는 모임 말미에 자본시장법 제47조를 '자본시장의 바이블'이라고 언급했다. 자본시장법 47조의1은 이렇다.
'금융투자업자는 일반투자자를 상대로 투자권유를 하는 경우에는 금융투자상품의 내용, 투자에 따르는 위험,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을 일반 투자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