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미 대사는 왜 유엔 총회장을 숨가쁘게 뛰었나

[특파원칼럼]미 대사는 왜 유엔 총회장을 숨가쁘게 뛰었나

뉴욕=심재현 특파원
2025.03.20 03:50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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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총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주년을 맞아 러시아 규탄 결의안이 투표에 부쳐졌던 날이다.

회의 중 투표가 임박했을 때 미국 대표부 대사가 갑자기 회의장을 가로질러 달려가 러시아 대사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미국 대사의 돌발행동에 회의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 이후에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변화를 이만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현장을 지켜봤던 한 관계자는 회의장에 있던 모두의 입에서 "세상에"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트럼프 1기-바이든-트럼프 2기로 이어진 미국 정치의 변화가 국제질서 변화의 역사가 되고 있다. 트럼프 1기 때 이익과 거래, 양자주의에 집중했던 세계가 이념과 규범, 다자주의로 옮겨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유엔 193개 회원국이 2030년까지 기아방지, 환경보호, 모두를 위한 번영, 평화증진 달성을 골자로 만장일치로 채택한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미국이 이달 7일 거부, 포기하겠다고 밝힌 것도 미국과 국제질서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정의와 평화, 공존을 내세우며 언제나 다수의 편을 이끌었던 미국이 러시아, 북한, 벨라루스, 수단과 함께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장면이 됐다.

다시 만난 트럼프의 나라는 4년 전 그때처럼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선택적 관여, 힘의 균형을 맞추는 역외 균형자 역할에 다시 치중하는 모습이다. 전통적 동맹의 가치보다 하나하나의 이익을 따지고 드는 트럼프주의에서 우리가 알던 'USA 대디'의 모습은 더이상 찾을 수 없다.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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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더 깊숙하게 들여다볼 지점은 4년 후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한번 달리기 시작한 미국의 변화는 이제 돌이키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작금의 변화가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미국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한 결과인 까닭이다.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 특히 달러를 찍어내는 것만으로도 잘 먹고 잘 살았던 황금기가 지나가고 팍팍해진 현실이 트럼프 캠프의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대한 미국의 진심을 감추기 힘든 궤도에 올려버렸다.

트럼프 1기와 2기 사이에 끼었던 조 바이든 전 정부 시절 이미 어느 정도 경험했다. 다자주의와 외교적 언사로 포장해 티가 덜 났을 뿐 바이든 정부도 트럼프 1기의 보호무역주의, 엄밀하게 말하면 미국 우선주의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지난주 뒤늦게 밝혀진 바이든 정부 말기의 대한민국 민감국가 지정도 따지고 보면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의 변주다. 4년 후 미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변화는 이제 대세라는 얘기다.

문제는 우리다. 그동안 미국과의 가치동맹을 표방하며 국제사회 대립의 최전선에 섰던 정책을 우선 점검할 리더십이 부재한 사이 곳곳에 "우리는 친구"만 외치는 순진함이 넘실댄다. 전략적 동맹 강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게 걱정이다.

이영애, 유지태가 주연을 맡았던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속 상우(유지태)의 대사(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빌리면 "동맹이 어떻게 변하니"라 주절대는 모습 정도가 되겠다.

드라마 작가 노희경은 봄날은 간다 감상평에 "여자에게 소년은 버겁다"고 썼다. 순수가 사랑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순수를 동경한다. 국제사회의 현실도 그렇다. 과거의 영광이 더이상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은 미국을 향해 어떻게 동맹이 변하니 하며 한밤중 서울에서 강릉까지 달려간 상우처럼 울며불며 매달려봐야 결말은 정해있다.

미국의 변화를 탓할 때가 아니다. 소년기의 순수를 동경할 때도 아니다. 국제질서 변화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이대로 또 다시 남의 손에 우리 운명이 휘둘리게 둘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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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현 특파원

머니투데이 뉴욕 특파원입니다. 뉴욕에서 찾은 권력과 사람의 이야기. 월가에서 워싱턴까지, 미국의 심장을 기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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