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반도체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 계약까지 무효화할 수 있는 비상 권한 도입에 나섰다. 반도체가 지정학적 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공급망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28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입수한 법안 초안에는 반도체 공급 위기 시 EU 집행위원회가 반도체 제조업체에 기존 계약보다 특정 주문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초안에 따르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무기, 의료기기, 디지털 인프라 등 핵심 품목 공급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반도체 기업들에 생산능력과 공급망 현황 관련 정보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이를 거부하는 기업에는 최대 30만유로(약 4억7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EU 회원국 공동 구매도 가능해진다. 이는 팬데믹 당시 백신 공동 조달 방식과 유사한 형태로, 집행위가 여러 회원국을 대신해 중앙 구매자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다.
이번 법안은 지난 2023년 4월 시행된 '반도체법'(Chips Act)을 보완한 '반도체법 2.0'이다. 초안은 다음 주 공개될 예정이지만 최종 조정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변경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EU가 이런 법안을 추진하는 배경엔 지정학적 불안이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반도체가 경제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반도체 공급망 리스크는 지난해 넥스페리아 사태로 이미 현실화된 바 있다. 지난해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 기업이 인수한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가 모기업인 중국 윙테크로 기술을 이전할 가능성을 우려해 경영권 개입에 나섰다. 이에 중국이 보복 조치로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넥스페리아 반도체에 대해 수출 차단에 나서면서 유럽 자동차 업체들은 반도체를 구하지 못해 생산을 줄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