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옥수수 한 개에 담긴 미래…추억을 산업으로 키우다

삶은 옥수수 한 개에 담긴 미래…추억을 산업으로 키우다

홍천(강원)=정혁수 기자
2026.08.0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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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환 옥수수연구소장이 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옥수수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정혁수
류시환 옥수수연구소장이 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옥수수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정혁수

"옥수수 삶는 냄새가 골목을 채우면 여름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에게나 어릴 적 이런 기억 하나쯤은 있다. 시장 입구 커다란 솥에서 김을 내뿜던 찰옥수수, 기차역 승강장에서 종이봉투째 사 들고 가족과 나눠 먹던 옥수수, 계곡에서 물놀이를 마친 뒤 허기를 달래주던 노란 간식.

옥수수는 우리 국민에게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의 냄새이자, 어린 시절의 추억이며, 세대를 이어온 가장 친숙한 국민 간식이다.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위치한 옥수수연구소 앞 신품종 전시포 안내판 /사진=정혁수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위치한 옥수수연구소 앞 신품종 전시포 안내판 /사진=정혁수

그 추억을 가져다 준 옥수수가 지금 강원도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는 전국 옥수수 재배면적의 약 35%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 산지다. 농가가 옥수수를 선택하는 이유는 벼보다 높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고, 시설원예처럼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중수익·중위험' 작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업을 둘러싼 여건은 변화하고 있다. 단순히 많이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농업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제는 '얼마나 재배했느냐'보다 '어떤 가치를 만들어냈느냐'가 경쟁력이 되고 있다.

류시환 소장(왼쪽에서 4번째) 등 옥수수연구소 관계자들이 세계 최고의 옥수수 품종개발을 다짐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사진=정혁수 기자 /사진=정혁수
류시환 소장(왼쪽에서 4번째) 등 옥수수연구소 관계자들이 세계 최고의 옥수수 품종개발을 다짐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사진=정혁수 기자 /사진=정혁수

이같은 변화의 중심에 강원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옥수수연구소가 있다.

연구소가 바라보는 옥수수는 더 이상 찰옥수수만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견디는 품종, 건강 기능성을 높인 품종, 팝콘용 품종, 기능성 색소를 생산하는 자색옥수수까지 옥수수의 가능성을 새롭게 설계중이다.

대표적인 성과가 국내산 Non-GMO 팝콘용 품종 '알찬팝'이다. 그동안 수입 원료에 의존하던 팝콘 시장에 국산 품종이라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여기에 미홍찰, 미현찰, 부농찰, 아라리찰 등 소비자의 건강과 기호를 반영한 다양한 품종도 잇따라 개발했다.

특히 안토시아닌 함량을 기존 품종보다 크게 높인 기능성 옥수수는 식품은 물론 건강 소재 시장으로까지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사진은 '옥수수 종자.이삭 영상 촬영 및 표현체 분석 장비'. 옥수수 이삭 및 알곡의 크기, 폭, 색 등을 측정하여 데이터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전에는 사람이 모두 측정해야 했는데 이 장비를 이용하면 단시간에 정확하게 측정이 가능하다./사진=정혁수
사진은 '옥수수 종자.이삭 영상 촬영 및 표현체 분석 장비'. 옥수수 이삭 및 알곡의 크기, 폭, 색 등을 측정하여 데이터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전에는 사람이 모두 측정해야 했는데 이 장비를 이용하면 단시간에 정확하게 측정이 가능하다./사진=정혁수

찰옥수수를 중심으로 종자를 개발하고 보급하던 기존 품종 개발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 육종이 연구자의 경험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면, 이제는 AI(인공지능)와 디지털 기술이 새롭게 적용되고 있다. 연구소는 디지털 이미지를 활용해 옥수수의 생육 데이터를 수집하고 핵심 유전자원을 분석하는 디지털 육종 시스템을 구축했다. 품종 개발 기간을 줄이고, 기후변화에도 강한 내재해 품종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선발하기 위해서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연구도 속도를 내고 있다.

병해충이 늘어나고 농촌의 노동력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연구소는 줄기썩음병 저항성 계통을 육성하고 방제체계를 마련했다. 무인 스마트 방제기 활용 기술도 개발해 노동력은 67%, 방제 시간은 절반, 연간 경영비는 16%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

류시환 옥수수연구소장이 인근 재배농가, 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옥수수 품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정혁수
류시환 옥수수연구소장이 인근 재배농가, 연구소 관계자들과 함께 옥수수 품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정혁수

연구소가 만들어낸 변화는 시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옥수수는 맥주가 되고, 팝콘이 되고, 건강 간식이 되고, 화장품 원료가 된다.

국산 옥수수를 활용한 '옥시기비어'는 지역 맥주축제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았고, 산채팝콘과 다양한 시즈닝 제품도 개발됐다. 혈당 관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간식 '곤팝' 레시피와 옥수수 발효물을 활용한 화장품 점증제까지 탄생했다. 기술이전만 28건. 옥수수가 식탁을 넘어 식품·바이오·뷰티 산업으로 영역을 넓힌 것이다.

수출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연구소가 개발한 품종과 농식품연구소의 가공기술을 활용한 '떠먹는 옥수수 범벅'은 미국과 호주 시장에 진출했고, 정선의 특화품종 '아라리찰'은 레토르트 제품으로 상품화됐다. 국산 옥수수가 해외 소비자의 입맛까지 사로잡기 시작한 셈이다.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위치한 옥수수연구소 전시포 풍경 /사진=정혁수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위치한 옥수수연구소 전시포 풍경 /사진=정혁수

이 모든 성과 뒤에는 옥수수연구소를 중심으로 농업인, 농협, 식품연구소, 기업이 함께 만든 협업 생태계가 있다. 연구소는 종자를 개발하고, 농가는 계약재배를 통해 생산하며, 농협은 농업인과 계약재배를 통해 종자 보급을 맡고, 기업은 가공과 상품화를 담당한다. 연구실에서 시작된 작은 씨앗이 지역 산업과 수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강원도에서 개발한 찰옥수수 종자는 국내 찰옥수수 종자시장의 약 86%를 차지한다. 이는 연구기관과 농업인, 농협과 산업체가 긴 시간 쌓아온 신뢰의 결과나 마찬가지다.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위치한 옥수수연구소 전경/사진=정혁수 기자 /사진=정혁수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두촌면에 위치한 옥수수연구소 전경/사진=정혁수 기자 /사진=정혁수

여름이면 우리는 여전히 삶은 옥수수를 손에 든다. 하지만 그 한 알 한 알 속에는 이제 추억만이 아니라 AI가 분석한 데이터와 기후변화에 대응한 과학이 담겨 있고, 농가의 새로운 소득과 지역 산업의 미래가 함께 자라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옥수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면, 다음 세대에게 옥수수는 대한민국 농업이 기술과 산업으로 진화한 상징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김동훈 강원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장은 "앞으로 AI 기반 디지털 육종과 기후변화 대응 기술을 바탕으로 농업인의 소득을 높여 나가는 한편 대한민국 옥수수 산업이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연구와 산업화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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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수 기자

머니투데이 경제부에서 농업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UNC) 저널리즘스쿨에서 1년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2013년부터 정부세종청사 농식품부를 출입하며 한국 농업정책과 농업현장의 이야기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농업분야에 천착해 오는 동안 '대통령표창' 등 다양한 상을 수상한 것은 개인적으로 큰 기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신성장동력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농업의 무한변신'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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