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평택시는 산이 드문 대신 너른 들녘이 펼쳐진 곳이다. 신리(新里) 마을은 그 평야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100여 가구 가운데 절반가량이 논밭을 일구며 살아간다.
오랜 세월 이 마을 사람들 곁에는 쌀과 콩이 있었다. 주민들은 벼농사를 지으면서 논둑마다 콩을 심었다. 아낙네들이 서리태를 심고 정성껏 가꾸면, 가을걷이를 마친 남정네들이 콩을 거두고 털었다. 그렇게 수확한 서리태를 푹 끓인 콩죽은 집집마다 익숙한 음식이었다.
사람들은 콩을 오래 사는 비결로 여겼고, 민물생선찜을 할 때도 메주콩 한 움큼을 빠뜨리지 않았다. 콩은 먹거리이면서,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온 기억이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전대경 미듬영농조합법인 대표에게도 콩은 어린 시절 익숙한 풍경이었다. 수확철이면 7남매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작은 콩알을 솎아냈다.
그는 "논둑이나 배수로 주변에 콩을 많이 심었고, 콩을 즐겨 먹었다는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며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콩을 가까이하고 자라 지금도 콩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37년간 쌀과 콩 농사를 지어온 전 대표는 이제 콩이 더 많은 밥상에 오를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미듬영농조합법인은 쌀과 콩 등 지역 농산물을 과자와 떡, 빵으로 가공해 소비자와 만나게 한다.

눈여겨본 것이 단팥빵이다. 남녀노소 즐겨 먹는 단팥빵의 팥 앙금을 서리태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농림축산식품부·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국산콩 제품화 패키지 사업에 참여하면서 구상은 제품 개발로 이어졌다. 빵 제조업체와 손잡고 팥 앙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서리태로 대체한 제품을 개발 중이다.
전 대표는 "단팥빵은 워낙 많이 먹는 빵인 만큼 서리태를 앙금으로 활용하면 국산콩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며 "서리태 공급가격이 ㎏당 6000~7000원 수준이어서 수입 팥과도 경쟁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팥 앙금과 서리태를 절반씩 섞은 제품부터 서리태만 사용한 앙금까지 단계별로 개발한다. 서리태 맛이 낯선 소비자를 겨냥해 크림치즈와 서리태 앙금을 함께 넣은 빵도 준비하고 있다.

찐밤·군밤처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찐콩'과 콩국수용 콩물도 개발 중이다. 콩을 직접 불리고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일반 식당에서도 손쉽게 콩국수를 내놓을 수 있도록 한 제품이다. 전 대표는 콩물과 찐콩 등을 합쳐 연간 약 100톤(t)의 콩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콩을 만나는 방법도 바꾸려 한다. 벼가 자라는 논 가장자리를 따라 서리태가 무성해지는 풍경 자체를 쌀과 콩을 알리는 무대로 삼았다. 오는 10월 첫선을 보이는 '논숲'에서는 논둑길을 따라 걸으며 벼와 콩을 가까이서 보고, 전시와 문화체험을 즐길 수 있다. 쌀로 만든 빵과 가루쌀 국수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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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표는 "농민들이 박람회에 나가 경쟁력 있게 홍보하기는 쉽지 않다"며 "우리가 잘하는 것은 여기서 농사를 짓고, 농작물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콩에 얽힌 오래된 기억에서 새 먹거리를 찾은 것은 평택 농부만이 아니다. 대전에서는 할머니가 손녀에게 타주던 검정콩 미숫가루가 단백질 셰이크로 다시 태어났다.
식물성 식품을 만드는 박진아 휴닉 대표는 어릴 적 새치가 많았다. 할머니는 '검정콩을 먹으면 머리가 까매진다'며 콩을 볶아 미숫가루를 만들어 매일 아침 손녀에게 타줬다.
식물성 식단을 시작한 뒤 간편하게 먹을 단백질원을 고민하던 대표는 그 맛을 떠올렸다. 할머니의 미숫가루를 현대적으로 바꿔 국산 서리태를 넣은 단백질 셰이크를 개발했다. 한 해 사용하는 서리태는 최소 20톤이다.
국산콩 제품화 패키지 지원 사업을 통해 올해 6월부터 본격적인 수출에도 나섰다. 해외에서는 낯선 서리태와 '할머니의 주방에서 나온 레시피'라는 이야기가 오히려 차별점이 됐다. 오는 9월에는 물과 서리태만 넣은 콩물 제품도 선보인다.

같은 대전에서는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만들던 콩튀김이 아이들의 과자로 변신했다. 콩부각 브랜드 '콩드슈'를 운영하는 서동아 대표의 어머니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뒤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콩튀김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 대표는 어머니의 작업실을 오가며 자랐고, 대학생 때 작업장에 큰불이 난 것을 계기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년가량 제조법을 익힌 뒤 창업에 뛰어들었다. 서 대표는 "콩튀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엄마에 대한 기억"이라며 "어머니가 저희를 키우기 위해 했던 일이 콩튀김이다 보니 콩에 대한 감정이 각별하다"고 말했다.
반찬으로 먹던 콩튀김은 밀가루 대신 찹쌀을 입힌 바삭한 과자로 바꿨다. 와사비·불닭·딸기·멜론 등 다양한 맛을 더해 현재 20가지 안팎을 선보인다. 원료는 알이 크고 제조 과정에서 잘 깨지지 않는 국산콩을 사용한다.


국산콩 제품화 패키지 사업으로 신제품 개발에도 속도를 냈다. 지난해 약 23톤이었던 콩 사용량은 올해 40~45톤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다. 특히 1000원 미만의 15g 소포장 제품을 개발해 학교 급식 시장에 진출하면서 지난 3~4월부터 월 5만개가량을 공급하고 있다.
해외 시장도 두드리고 있다. 지난해 일본과 인도네시아 박람회에 참가했고 올해는 미국과 중국에서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서동아 대표는 "콩을 먹는 세대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과자처럼 콩을 친숙하게 접하고 어른이 돼서도 계속 찾을 수 있도록 젊은 세대와 국산콩을 연결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