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 등 중앙아 4개국 식량작물 연구기관과 협력체계 구축
-벼 육종·종자·물 절약 기술 공유…"10년 뒤 자립형 협력망 목표"

중앙아시아는 오래전부터 동서 문명이 만나는 길목이었다. 사람과 물자, 문화가 오가던 실크로드의 땅은 이제 '식량'과 '농업기술'이 오가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다.
고온과 가뭄, 물 부족, 토양 염류화가 겹친 중앙아시아에서 농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은 물과 종자다. 김병석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장이 최근 우즈베키스탄을 찾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병석 원장은 "좋은 종자를 한 번 주는 것으로는 지속적인 성과를 만들 수 없다. 현지에서 적합한 품종을 고르고 우량종자를 스스로 생산해 농가에 보급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립"이라고 2일 말했다.
김 원장은 이번 방문에서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해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 주요 식량작물 연구기관과 새로운 협력의 틀을 만들었다.

국가별로 이어져 온 협력을 품종과 유전자원, 재배기술, 연구인력까지 공유하는 다자간 연구협력체계로 넓힌 것이다.
협력의 중심에는 '벼'가 있다. 한국은 품종개발부터 종자 생산, 재배기술, 기계화, 현장 보급까지 하나의 체계를 구축해 왔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한국의 벼 육종기술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반대로 이 지역이 보유한 밀과 콩 유전자원은 우리나라의 미래 품종개발에 활용 가치가 크다.
김 원장은 "벼는 우리가 강점을 공유할 수 있고, 밀과 콩은 중앙아시아의 유전자원과 우리의 육종기술을 결합할 수 있는 작물"이라며 "이런 상호보완성이 협력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검증된 품종이 중앙아시아에서도 그대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벼 품종을 현지 시험포에 심자, 낮의 길이와 고온 등 환경 차이에 따라 출수시기와 생육반응이 달라졌다.

중요한 것은 한국 품종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현지 기후와 물, 토양에 맞는 품종과 기술을 함께 찾는 일이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벼연구소에서는 물 부족에 대응하기 위한 색다른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논에 물을 가득 대는 기존 방식과 달리, 관을 통해 벼 뿌리 주변에 필요한 만큼의 물을 공급하는 '점적관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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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는 1㏊에 2만톤 이상의 물이 필요하지만, 현지 시험에서는 이를 약 7000톤 수준까지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국가별 과제도 다르다. 우즈베키스탄은 물 절약과 종자 생산·보급체계 고도화, 카자흐스탄은 관개 자동화와 염류화 대응, 키르기스스탄은 밀·보리 품종개발과 안정생산, 타지키스탄은 밀·벼의 현지 적응성 평가가 중요하다.
김 원장이 강조하는 것은 '종자를 주는 협력'보다 '종자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협력'이다.
현지 연구자가 품종을 평가하고 우량종자를 증식해 품질을 관리하며, 농업인에게 재배기술까지 가르칠 수 있어야 지원사업이 끝난 뒤에도 기술이 남는다는 것이다.

이미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가능성이 현실이 되고 있다. 코피아(KOPIA·해외농업기술개발사업)와 현지 벼연구소가 함께 선발한 'Sadaf'와 'Billur'는 2024년 국가품종으로 등록됐다.
현지에서는 우량종자 생산을 확대해 2028년 약 2600㏊에서 1만5000톤 수준의 종자를 생산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김 원장은 이를 중앙아시아 4개국으로 확장해 품종과 유전자원, 재배기술, 연구성과와 전문가를 연결하고 장기적으로는 연구정보까지 공동 활용하는 체계를 만들 계획이다.
국립식량과학원의 식품자원개발 기능과 KOPIA의 현지 실증·보급 역량을 결합해 '품종개발-종자생산-재배-가공·이용'으로 이어지는 패키지형 협력모델도 구상하고 있다.
기후변화가 거세질수록 한 나라가 가진 유전자원만으로 고온·가뭄과 새로운 병해충에 대응하기 어렵다.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밀·콩 유전자원과 극한환경 적응 자원은 우리의 미래 식량안보에도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벼 육종·재배기술과 중앙아시아의 유전자원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구조다.
김 원장의 시선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한다. 5년 안에 각국에서 공동연구 성과를 만들고, 10년 뒤에는 중앙아 국가들이 유전자원과 연구성과를 공유하는 자립형 식량기술 협력망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한때 사람과 문물이 오가던 실크로드에 이제는 품종과 종자, 농업기술과 연구자가 오가는 '식량기술의 새 길'을 놓는 것. 그 길을 중앙아시아 스스로 품종을 개발하고 종자를 생산해 식량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자립의 기반으로 이어가겠다는 구상이다.
김병석 국립식량과학원장은 "기술을 건네는 데서 끝나는 협력은 오래갈 수 없다"며 "중앙아시아 연구자들이 스스로 품종을 개발하고 종자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 자립적인 식량생산 기반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식량원이 가진 기술과 경험을 아낌없이 공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