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공시 의무화, 속도보다 준비가 우선

ESG 공시 의무화, 속도보다 준비가 우선

최정일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
2026.02.02 05:50

올해는 한국 기업에 중대한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지속가능성(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가 상반기 내 최종안 확정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ESG 규제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속도를 앞당기는 선택이 과연 합리적인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글로벌 기후 규제 환경은 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추세다. 특히 미국의 변화는 상징적이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2024년에 만든 기후공시 규칙에 대해 주정부와 산업계 등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지난해 3월 트럼프 행정부는 이 규칙을 더 이상 법적으로 방어하지 않기로 했다.

기업의 직접적인 통제 범위 밖에서 발생하는 모든 간접 온실가스 배출량을 측정하는 'Scope 3(공급망 배출량 공시)'는 기업의 부담을 고려해 아예 제외했다. 연방 차원의 ESG 공시 의무화도 당분간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유럽연합(EU)도 예외는 아니다. 유럽의회가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및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 시행 일정을 미루는 'Stop-the-Clock(시계 멈춤)' 조치를 승인했다. 기업 부담 완화를 위해 적용 범위를 축소하고 중소기업 보호 장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수정하고 있다.

한국은 오히려 공시 도입을 서두르고 있으나 기업들의 준비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ESG 공시는 단순한 정보 공개가 아니라 데이터 수집과 관리, 내부 통제, 외부 검증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경영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특히 공급망 전반을 포괄하는 공시는 대기업뿐 아니라 수많은 중소 협력사에 부담을 전가할 수 있다.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도 우려는 존재한다. 주요국들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규제 속도를 조절하는 상황이다. 한국만 선제적으로 강도 높은 공시를 도입할 경우 제조업 비중이 높은 산업 구조상 공급망 배출량 공시 부담은 더 클 수밖에 없다.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까지 고려하면 수출 가격 상승 압박은 현실적인 우려다.

ESG 경영의 목적은 공시 자체가 아니라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 위에서 책임 있는 경영을 정착시키는 데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무화의 속도를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을 먼저 조성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대안은 의무화 시기를 2029년 이후로 미뤄 기업들에게 충분한 준비 시간을 주는 것이다. 특히 기업이 가장 힘들어하는 공급망 배출량 공시(Scope 3)는 최소 5년 동안 유예하거나 원하는 기업만 할 수 있도록 선택 사항으로 바꿔야 한다. 또 고의가 아닌 실수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 면책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제3자 검증 시스템을 먼저 갖춰야 한다.

ESG 공시는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다. 글로벌 규제 환경이 안정화되는 흐름을 지켜보며 단계적이고 유연한 접근을 선택하는 것이 한국 경제와 우리 기업 경쟁력 제고에 더 부합하는 길일 것이다.

최정일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한국경영학회 차기회장).
최정일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한국경영학회 차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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