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세 무상보육의 지속 여부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지난해 말 정부가 먼저 발표하고 여야가 확대 수용하면서 3월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지자체들이 예산 고갈로 어려움을 호소하자, 정부는 '선별 지원'으로 되돌아갈 조짐을 보이고 여야는 맹공에 나서고 있다. 씁쓰름하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정치의 잔인함이다. 영유아는 태어난 사회와 자신들의 대리인들에게 삶을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 말 못하는 영유아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국카스텐(Guckkasten)이다. 정치 산술의 대상을 처음부터 잘못 선택했다.
둘은 잘못된 계산이다. 어느새 출산과 생산가능인구의 증대가 경제성장의 지름길이 된듯하다. 무상보육 정책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영유아의 보육료와 교육비를 지원하여 자녀 양육비용 부담을 경감시킴으로써 저출산을 감소시키기 위한 정부 지원 사업입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도 하고, 복지와 성장은 같이 가는 것이라고도 한다. 산업화 시대의 양적 성장의 신화가 너무도 뿌리 깊기에, '출산율=경제성장율'이라는 등식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영토와 인구의 규모로 국가의 규모를 재는 오래된 습관이 아직도 남아있는 탓이다. 하지만 아이디어의 크기가 개인의 크기를 결정하듯, 아이디어의 크기가 국가의 크기를 말해주며, 아이디어의 보편성이 국가의 규모를 대변하는 세계로 접어든지 오래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의 위치에서 독일의 크기는 날로 커가고 있지만, 일본은 작아지고만 있다. 아이디어의 크기와 보편성으로 따져본 대한민국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또 중국은 얼마나 클까? 경제 성장은 1인당 생활수준의 향상이고 1인당 생산성의 향상이 경제성장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가르침은 빈말이 아니다.
셋은 가치기준의 상실이다. 자신의 삶을 사회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그룹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장애인, 영유아, 고령자 그리고 절대 빈곤층이 먼저 꼽힐 것이다. 이들 중 절대빈곤층을 제외하고 복지의 순위를 꼽는다면 누가 우선되어야 할까? '나는 가수다'의 순위 매기기를 쉽게 뛰어넘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다. '선택적 복지'를 복지제도의 근간으로 유지해온 한국에서 무상보육의 시행은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공교롭게도 정부와 정치권은 영유아를 장애인과 고령자 앞에 내세우는 가치판단을 한 셈이다.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앞의 표현대로라면 저출산을 되돌리기 위함이다. 다소 가혹한(?) 경제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래 세대가 장애인과 고령자에 비해 생산 면에서는 절대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절대 우위를 따라야한다면 타이거 우즈는 잔디깍기며 집안 청소며 온갖 육체노동을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타이거 우즈는 자신이 비교우위를 가진 잔디깍기에 전념하고 나머지 일들은 절대열위에 있지만 나름 비교우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맡기고 있다.
장애인과 고령자가 절대열위에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나름 비교우위를 갖는 것은 확실하다. 가급적 많은 시장교환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시장경제의 요체이고 국민경제를 키우는 지름길이다. 서구의 대기업들이 오래 전에 몸집 키우기를 멈추고 소기업에 기웃거리며 같이 뭔가 해보려는 몸짓은 시장경제를 잘 이해하고 있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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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기반 경제에서 네트워크형 대기업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장애인과 고령자를 시장의 교환과정에 어떻게 하면 더 참여하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은퇴 세대의 시장 참여를 어떻게 더 늘릴 가를 숙고해야 한다. 중소기업과 영세상공인에게 어떻게 더 활력을 불어넣을 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복지를 사회화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일부 연유한다. 너무 앞선 듯싶지만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결국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