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한국이 집중해야 할 것은 첫째도 AI, 둘째도 AI, 셋째도 AI."
2019년 7월이었다. 손정의(마사요시 손)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정부 고위 인사들을 앉혀놓고 한 강연의 주제는 AI(인공지능)였다. 세계는 인터넷 시대를 거쳐 AI 시대를 맞았다고 했다. 한국이 초고속인터넷에서 세계 1등을 하며 정보통신 강국으로 거듭났지만 AI는 다소 늦은 상태라고 지적하며 교육과 정책, 투자, 예산 등을 통해 AI를 전폭적으로 육성하라고 조언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뉴스1 기자는 '문 대통령은 크게 감명했다'고 기사에 덧붙였다.
5년 반이 흐른 지금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AI의 영역은 넓어졌다. 대화형 AI 서비스인 챗GPT가 등장해 지식기반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더니 AI에 필요한 고성능 컴퓨팅을 위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생산하는 반도체업체가 주목받았다. 자동차 자율주행 기술과 로봇 기술은 AI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AI를 이용해 임상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신약을 개발하는 시대까지 왔다.
작년 미국 주식시장 주가 상승 상위 기업 명단에서 팔란티어테크놀러지와 비스트라, 엔비디아, 아스테라 랩스, 사운드하운드AI 등 AI업체나 AI인프라업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본시장은 이미 AI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어디까지나 미국 등 딴 나라 얘기다. 한국은 이런 거대한 흐름을 올라타지 못했다. 지난해 국내 주식시장에서 주가 상승률 순위 10개 기업 가운데 AI 수혜기업이라곤 북미시장 수출 증가 등이 부각된 전력기기 제조사 HD현대일렉트릭 뿐인 것만 보면 알 수 있다.
국내 투자자들이 '국장'을 이탈해 '미장'으로 넘어간 것도 국내에선 AI시대를 주도하는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서학개미'가 지난해 미국 증시에서 많이 사들인 10개 종목 중에는 테슬라와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A, 팔란티어 등 AI 관련주가 절반에 달한다.
정부가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며 자본시장밸류업 프로그램을 마련했지만 한계가 분명한 것도 같은 이유다. 기업들이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 등에 밸류업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조삼모사다. 영업을 잘하거나 자산을 매각해 남긴 돈으로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를 사들이면 그만큼 현금성 자산이 줄어들기 때문에 새로운 사업이나 연구개발, 인수·합병 여력은 줄어들게 된다. 주주가 받게 되는 돈(세전)이나 태워버린 주식만큼 회사가 보유한 현금도 사라진다. 기업의 내재가치가 오르는 건 아니다. 가치를 나누느냐 모아두느냐만 다를 뿐 가치의 총합은 같은 '가치보존의 법칙'이 적용된다.
독자들의 PICK!
밸류업은 기업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손정의가 굳이 청와대를 찾아간 것도 국가 시스템 전반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AI에 교육과 정책, 투자, 예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했지만 교육은 의대를 맨 꼭대기로 하는 피라미드를 부수지 못했고, 기업 정책은 부자 감세, 반노동 프레임에 갇혔다. 투자와 예산은 재난지원금 등 일반 국민에 대한 현금성 지원을 늘리느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잃어버린 삼성의 10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감도 얻지 못하고 법률적으로도 논란이 있는 사법 작용이 기업의 미래를 옭아맸다. 여전히 연구개발인력이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도록 하는 반도체특례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상부구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가장 좋은 밸류업 대책은 정치와 행정을 밸류업하는 것이다. 기업을 몰아붙일 게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이 먼저 변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손정의가 청와대를 찾은 5년 반 전이 골든타임이었다. 그 부작위의 결과가 투자자들이 떠나는 지금의 자본시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