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토시 나카모토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공적자금을 통해 큰 수익을 만들고 '돈 잔치'를 벌인 금융회사의 탐욕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인 대 개인 전자화폐 시스템'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온라인 결제를 실현하겠다"는 목표 아래 이듬해인 2009년 암호화폐 '비트코인'을 탄생시켰다.
이게 뭐냐는 목소리가 컸지만 비트코인은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왔고 이제는 사실상 널리 공인된 존재가 됐다.
하지만 창조자의 목적을 사용자가 그대로 따르라는 법은 없다.
창조자는 '자유로운 결제 수단'으로써 이를 만들었지만,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과 같은 존재로 쓰이며 '투자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화폐라면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교환이 자유로워야 하지만 비트코인의 가치는 매일같이 오락가락한다.
나카모토가 원한 온라인 결제는 다른 방식으로 실행될 상황이다. 지난달 미국 하원은 암호화폐 3법(지니어스법, 클레러티법, 반CBDC법)을 통과시켰다.
이중 대통령 서명까지 마친 지니어스법은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량만큼 미국 달러나 단기 국채 같은 안정성 있는 자산을 담보로 보유하도록 하고, 발행자가 매달 보유 자산 구성을 공개하도록 했다. 코인 1개가 1달러 수준을 유지하도록 안전장치를 둔 것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넣었다는 의미가 있다. 반CBDC법은 "프라이버시 및 시민의 자유"를 이유로, 중앙은행이(연방준비제도) 디지털 화폐(CBDC)를 발행하지 못하게 하는 게 주 내용이다.
'디지털 달러'가 가장 안정적이고 접근하기 쉬울 것 같지만 이를 막고, 대신 충분한 담보를 둔다는 전제로 '스테이블코인'을 한껏 밀어올렸다.
근데 이미 온라인 결제, 송금이 어렵지 않은데 누가 스테이블코인을 쓸까? 인플레이션이 심하며 자국 화폐 가치가 안정적이지 않고, 은행 접근성이 떨어지는 국가에선 이미 많이 쓰이고 있다. 어차피 달러화를 원하는데 스테이블코인이라면 송금(특히 국외 송금), 예치에 걸림돌이 없어 더 낫다.
최근 포브스 아프리카는 옐로카드(아프리카 지역 스테이블코인 결제 플랫폼)의 보고서를 인용해 2023년 7월~2024년 6월 나이지리아에서 스테이블코인 거래 규모가 약 220억 달러(30조원)로 아프리카 내 가장 큰 시장이라고 전했다. 아프리카 내 기업의 스테이블코인 사용도 지난해 25% 늘었는데 국경 간 송금, 공급망 정산, 급여 지불 등 목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도 지난해 스테이블코인 거래액은 2024년 15조6000억 달러로 비자 등을 넘었다.
암호화폐 정보 사이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26일 기준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2900억달러(404조원)가 넘는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테더, 서클 등 달러에 연동된 코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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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CBDC 대신 스테이블코인을 택한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결정 이유와도 연결돼 있다.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에 미 국채 등을 담보로 두게 했다. 테라-루나 사태를 많은 이들이 봤으니 안정성을 높인 이 정책에 대한 시장 거부감은 없다.
아직 비중이 크지 않지만 스테이블코인이 법에 따라 미국 국채를 사면 미국은 국채 발행 금리를 낮출 수 있고, 이같은 수요는 트럼프가 예민해 하는 달러 패권 지키기에도 도움이 된다. 미국은 새로운 시장을 주도하면서 달러 패권까지 지킬 수 있다. 미국이 움직이자 한국, 일본 등 다른 나라도 스테이블코인을 서두르지만 달러 기반 코인을 이기긴 어렵다.
지난 21일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는 3년여 뒤 스테이블코인 시총이 1.2조달러로 지금의 4배 이상으로 커질 거로 예상했고, 야후 파이낸스에 따르면 스탠다드 차타드는 이보다 훨씬 큰 2조달러로 예상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새 결제 시장을 열었다. 그런데 되짚어보면 나카모토가 꿈꾸던 '탈중앙화' 한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중앙의 그늘로 들어갔다. 블록체인 기술은 남았지만 비트코인이 태어난 목적은 더 이루기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