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과 반도체 때문에 온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무엇보다 우승이나 4강도 아닌 처음부터 기가막힌(?) 목표(32강 진출)를 정해놓고, 그마저도 달성하지 못한 채 불명예 퇴진한 홍명보 국가대표팀 감독에 대해 들끓고 있는 국민적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마지막 승부처인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역대급 졸전은 축구팬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골프를 치다보면 퍼딩 때마다 듣게 되는 오랜 격언이 있다. '홀컵을 지나가야 공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최대한 타수를 줄여야 하는 게임이다 보니 홀컵에 공을 넣지 않고선 이길 수가 없다. 아마추어 골퍼들이야 홀컵 가까이만 붙이기만 해도 잘했단 칭찬이 돌아오지만 프로 경기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홍 감독의 축구를 두고 쏟아진 비판도 마찬가지다. 전략이나 전술이 보이지 않는 이른바 '(선수들이 알아서)해줘' 축구로는 상대방을 꺾기 어렵다. 득점이 절실한 순간에 공격보단 수비에 치중하고, 우리 진영에서 여유롭게 볼을 돌리면 당연히 승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오죽한면 골문을 위협하는 유효 슈팅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남아공전을 두고, '그린(골 에어리어)'에도 올리지 못하고 '홀인원(요행)'만 바란 것 아니냐는 힐난이 나올까.

반면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양대축으로 시장이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삼성전자(314,500원 ▼19,500 -5.84%)·SK하이닉스(2,560,000원 ▼90,000 -3.4%)를 향한 시선은 홍감독을 둘러싼 평가와는 확연히 다르다. 우선 지난달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삼성·SK(763,000원 ▼71,000 -8.51%)그룹이 '서남(호남)권 클러스터(복합단지)'를 포함해 발표한 반도체 투자 계획(3200조원)이 당초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어서다. 앞서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낯선 숫자를 보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게 허세가 아님이 확인된 셈이다. 물론 '인공지능(AI) 대전환 시대'에 맞는 '속도전'을 독려하고 나선 두 그룹 수장(감독)의 미래를 꿰뚫는 선구안을 곱씹어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단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AI로 인해 기술 패러다임이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변하고 있지만 폭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엔 부족하단게 시장의 시각"이라고 진단한 뒤 "(경기) 기흥·화성·평택에 이어 용인 산업단지(산단) 투자 계획도 많이 빨라졌고, 새 단지를 준비해야 할 시간도 앞당겨졌다"며 "AI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첨단 패키징 투자도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글로벌 수요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시장을 만들기 위한 의사결정"이라고 전제한 뒤 "이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극심한 공급 부족 상태이고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며 "지나친 공급 부족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뿐만 아니라 AI 시장 성장까지 위축시킬 우려가 있는데 (이번 투자로도) 여전히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는 어렵다"고 자신했다.
다만 "360도 전방위, 전속력으로 'AX(AI 전환)'에 돌입할 것"을 주문한 최 회장의 경우 반도체를 비롯해 AI 데이터센터와 전력, 통신을 하나의 생태계로 묶는 'AI 풀스택(Full Stack)' 구축에 그룹의 명운을 내건 만큼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난제가 있다. 바로 두산그룹에 매각을 추진하다가 중단된 SK실트론 얘기다. 이미 세계 3위의 웨이퍼(반도체 칩을 만드는 얇은 원판) 제조사인 SK실트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단 그룹 안팎의 지적을 외면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매각이 필요했던 과거와 달리 상황이 변했다면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가능한 신속하게 정리하는게 상식이고 순리다. 그간 치밀한 'AI 빌드업(build-up)'에 진력해온 최 회장의 '닥공(닥치고 공격)'이 틀리지 않았단 걸 입증할 현명한 선택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