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헌이요? 사실 정책면에서 보면 우린 이미 내각제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해 가을 여의도 정가에서 개헌 논의가 한창 불거지고 있을 때다. 국회에서만 30년 가까이 근무한 한 국회 관계자가 이런 얘길했다. 주요 정책이 입법 과정을 거쳐서 확정되고 그 결정권을 국회가 갖고 있다. 그러니 정책에 관한한 국회가 국정을 책임지는 내각책임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주요 정책들은 정부의 의지나 발표와는 무관하게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야 확정 되고 시행된다. 지난 연말 우여곡절 끝에 통과한 이른바 '부동산 3법'은 정부가 언제 처음 정책을 내놨었는지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청와대와 국회의 역할 분담은 이런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청와대는 국정운영의 모든 짐을 떠안으려 하고 국회는 '대통령제'의 그늘에 숨어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기 일쑤다.
이번 연말정산 논란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낸 예산안이나 세법의 큰 골자가 바뀌는 경우는 드물다. 여야가 서슬 퍼렇게 고치겠다고 달려들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기본적으론 국정 책임이 대통령과 정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지역구 예산 챙기기나 정치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항목을 조정하는 수준이다.
연말정산 파동의 계기가 된 2013년 말 세법 개정 때도 그랬다. 핵심인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과 관련해 야당 의원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정부와 여당을 설득하지 못했다. 세액공제 방식이 중산층에게 직격탄이 될 거란 우려도 나왔지만 논의는 나아가지 못했다. 야당은 소득세 최고세율 구간을 '3억원 이상'에서 '1억5000만원 이상'으로 조정, 과세대상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둔데 만족했다.
결과는 혹독했다. '연말정산 파동'을 겪으면서 여당은 정밀 검증 약속에 소급적용 카드까지 꺼냈다. 야당도 제대로 심사를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했다. 박 대통령도 다시한번 국민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연말정산 파동은 많은 것을 남겼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추세를 심화시켰고 새누리당 차기 원내대표 경선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후보로 나선 유승민 의원은 '당 중심'을 들고 나왔다. 박 대통령도 두 부총리에 이어 총리에도 현직 여당 원내대표를 임명하는 등 당청관계에 더욱 무게를 싣고 있다.
임기 후반이 다가올수록,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질수록, 국정 운영의 동력은 당으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계속해서 청와대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고 여야는 훈수 뜨는 수준에 그친다면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리 없다. 청와대는 짐을 나눠야 하고, 국회는 자기 짐을 책임져야 한다. 우리 대통령제 속에 숨은 내각제 현실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제2의 연말정산 파동'을 막는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