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②새로운 대한민국, 6.3 지방선거부터

대한민국의 재정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거대한 장벽은 역설적이게도 재산 낭비를 막기 위해 도입된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 제도다.
1999년 도입된 예타는 과거 고도 성장기 무분별한 토목 사업을 막는 데 기여해 왔다. 하지만 도입된 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예타는 변화된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잣대가 됐다. 현재의 예타는 단순히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하는 문턱을 넘어, 국가의 미래 산업 포트폴리오 구성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전락했다.
기초·광역·중앙정부에 서로 다른 금액 기준이 적용되지만, 이러한 획일적 기준은 여전히 행정 편의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기준선 아래로 사업비를 맞추려는 예산 쪼개기와 꼼수 사업이 만연하다. 정작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대형 혁신 프로젝트들은 과거의 지표에 묶여 수년간 표류한다. 기회비용 이론에 따르면, 적기에 투입되지 못한 예산은 단순한 지연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영구적인 손실을 의미한다.
이제 예타는 예산 낭비를 막는 파수꾼을 넘어, 국가의 자산을 어디에 투자할지 결정하는 지능형 투자 심사 시스템으로 전면 개편돼야 한다.
현재 예타의 핵심 지표인 비용 대비 편익 분석(B/C)은 철저히 과거 데이터와 인구 통계에 의존한다. 인구가 많은 수도권은 항상 경제성이 높게 나온다. 인구가 적은 지방은 아무리 혁신적인 사업이라도 경제성 문턱을 넘기 어렵다. 수도권 집중화라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국가 시스템이 스스로 강화하는 꼴이다. 디지털 인프라 사업조차 과거의 전통적인 사회간접자본(SOC)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 AI(인공지능) 고속도로나 데이터센터 거점 구축 사업은 초기 비용 부담은 크지만, 그 파급 효과는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다. 지금의 예타 평가 모델은 이런 미래 가치와 플랫폼 파급력을 계산할 산식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1970~80년대의 고속도로 건설 기준을 21세기 디지털 혈관 사업에 적용하는 것은 마치 스마트폰의 가치를 공중전화 보급률로 측정하는 것과 같다.
고전적 가치 평가 방식인 NPV(순현재가치) 역시 할인율 설정의 경직성으로 인해 장기적인 혁신 사업의 가치를 저평가한다. 이제는 단순 경제성 위주의 평가에서 벗어나 국가 전략적 가치와 미래 수익 창출 능력을 중심으로 심사 체계를 혁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예타 개혁의 가장 시급하고도 치명적인 문제는 심사를 담당할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중앙정부에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문적 역할을 하지만 기초와 광역 지자체 상황은 참담하다. 행정안전부의 '지방재정 투자심사 제도 개선방안' 연구 등에 따르면, 전국 다수 기초 지자체에서 투자심사 전담 전문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일반 행정직 공무원이 순환보직으로 1~2년 정도 머물다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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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이 결여된 심사는 결국 서류만 분석하다 끝난다. 사업의 기술적 타당성이나 미래 수익성을 분석할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외부 용역 업체가 가져온 부풀려진 보고서를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통계에 따르면 지방 예산 사업의 수요 예측 오차율은 평균 30%에서 최대 50%에 달하며, 심한 경우 예측치 대비 실제 이용률이 10% 미만인 사업도 있다. 전문가 없는 심사가 선심성 정치 사업의 통로로 활용되면서, 지방재정은 '지어놓고 보자'는 식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단순 행정 실수를 넘어 국가 자산의 심각한 배분 왜곡을 초래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돈을 쓰고 난 후의 평가 시스템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재정학 논문과 국회예산정책처의 보고서는 사후 평가의 실효성 부족을 공통으로 지적한다. 현재의 시스템은 예산을 따내는 데만 총력을 기울일 뿐, 투입된 예산이 당초 목적대로 성과를 냈는지 검증하는 사후 피드백 고리가 끊어져 있다. 사후 평가가 이루어지더라도 이는 단순한 요식 행위에 그치며 차기 예산 편성이나 인사고과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이른바 매몰 비용(Sunk Cost)의 오류에 빠져 명백히 실패한 사업임에도 계속해서 운영비를 투입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2024년 기준 전국 지방 공공시설 중 70% 이상이 적자다. 심사 단계에서 건립비(CAPEX)만 따지고 운영비(OPEX)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패한 사업에 대해 책임을 묻거나 사업을 중단하는 평가 기제가 작동하지 않은 점도 직접적 이유다.
사후 평가가 형식적인 보고서 한 장으로 대체되는 현 제도는 예산 낭비를 방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관료 조직의 특성상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기보다 추가 예산을 투입해 실패를 덮으려는 '에스컬레이션 효과'에 먼저 주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혁명적인 도구는 바로 AI다. 최근 행정학 및 데이터 과학 분야의 논문들은 AI를 활용한 '증거 기반 정책 결정(Evidence-Based Policy Making)'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제시한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계산을 빠르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편향성을 제거하고 초정밀 미래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재정 혁신의 핵심이다.
첫째, AI는 초정밀 수요 예측을 통해 B/C 분석의 정합성을 획기적으로 높인다. 과거의 선형 회귀 분석에서 벗어나 지리 정보, 유동 인구, 소비 패턴, 글로벌 산업 트렌드 등 수만 개의 변수를 딥러닝으로 분석한다. 수요 부풀리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디지털 트윈' 기술을 결합하면 가상 세계에서 사업의 성공 여부를 미리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둘째, 실시간 사후 관리 및 환류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 AI 기반 재정 모니터링 시스템은 투입된 예산의 집행 과정과 성과지표를 실시간으로 추적한다. 예측치와 실적치 간의 오차가 발생할 경우 AI가 즉각 경고를 보내고, 사업 수정이나 중단에 필요한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는 전문가 부족에 시달리는 지자체에 강력한 의사결정 보조 도구가 된다.
셋째, 정책 시너지 분석의 자동화다. 국가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특정 사업이 다른 사업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즉 네트워크 효과를 계산하는 데 AI는 압도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이를 통해 파편화된 예산 사업들을 하나의 유기적인 성장 동력으로 묶어낼 수 있다.
예비타당성 심사는 국가라는 거대한 배가 어디로 향할지 결정하는 열쇠다. 기초, 광역, 중앙정부의 심사 체계를 AI 기반 지능형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건 단순히 절차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 예산이라는 귀한 자산을 매몰 비용이 아닌 미래 수익으로 전환하는 재정 혁명의 시작이다. AI 도입을 통해 우리는 전문가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인 과학적 심사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심사 기준 금액을 올리는 지엽적인 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AI라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해 무엇을, 어떻게,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심사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내놔야 한다. 지자체에 전문 인력을 확충하는 것과 동시에 데이터 기반의 객관적 심사 툴을 보급해야 한다. 낡은 예타의 틀을 깨고 데이터와 미래 가치가 살아 숨 쉬는 지능형 심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돈 버는 국가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라설 수 있다. 재정 개혁의 완성은 예산의 문턱을 가장 높고 똑똑한 AI 나침반으로 만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