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초대석
혁신, 도전, 소통, 전문성으로 대한민국 각계 리더들의 성장과 변화를 조명합니다. 과학, 금융, 교육, 공공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전하는 경험과 비전,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소개합니다.
혁신, 도전, 소통, 전문성으로 대한민국 각계 리더들의 성장과 변화를 조명합니다. 과학, 금융, 교육, 공공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전하는 경험과 비전,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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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수 메리츠화재 사장(사진)을 만나면 부드러움 뒤에 감춰진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미소가 온화한 원 사장이지만 수익경영을 강조하는 어투에는 강함이 배어있다. 28년동안 미국에서 지내온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소탈함으로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원 사장은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교를 마친 후 그곳에서 20여년간 보험전문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손해보험 분야 세계 최고자격증인 미국 공인 손해보험 언더라이터(CPCU)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CPCU는 국내에서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25명에 불과할 정도로 자격증 취득이 어렵고 그만큼 전문성을 인정받는 시험이다. 그는 대화형 CEO로 통한다. 항상 직원들과 대화하기를 즐기는 원 사장은 직원들의 의견수렴에 적극적이다. 대화는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오프라인은 CEO와의 간담회, 직원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이뤄지고 온라인은 블로그가 소통 수단이다. 원 사장은 CEO 블로그를 만들었다. 그중 '마이크 라이프(Mik
[머투초대석]메리츠화재 원명수사장 "사명변경 계기로 제2창업" "83년 동안 사용한 사명을 버리고 메리츠화재(옛 동양화재)로 바꾸는 작업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업계 5위에 안주하며 변화에 소극적이었던 자세에서 벗어나 고객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준다면 모멘텀의 계기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지난달 사명을 변경하고 제2창업을 선언한 메리츠화재가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울러 본사를 강남으로 이전, 강남시대를 연 메리츠화재는 메리츠증권을 자회사로 인수하는 데 성공, 금융지주회사의 초석을 놓는 새로운 계기도 마련했다. 특히 메리츠화재는 최근 수익경영을 표방하면서 제살깎기식 출혈경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되고 있다. 취임과 동시에 사명 변경과 사옥 이전이라는 큼지막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원명수 사장(사진)을 만나 포부와 경영전략을 들어봤다. ―기업이미지(CI) 변경과 본사 이전 등 굵직한 사업을 잘 마무리한 것같습니다. 메리츠화재를 어떻게 이끌어갈 계획이십
[머투초대석]조영주 KTF 사장 "CID 요금인하, 경쟁상황 고려해 결정하겠다" 취임 100일을 갓 넘긴 조영주 KTF 사장의 어깨는 요즘 너무 무겁다. SK텔레콤이 발신번호표시(CID) 요금을 2006년 1월1일부터 무료화하겠다고 공식 선언했기 때문에 경쟁사 최고경영자(CEO)로서 느끼는 마음의 부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어렵사리 마련된 자리에서 조 사장이 '요금'에 대한 화두를 시종일관 피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압박감 탓인듯 보였다. "CID요금? 사실 KTF로선 투자 회수도 못한 상황이라서 요금인하를 하기가 쉽지 않다"며 어렵게 말문을 뗀 조 사장. 그러나 경쟁업체, 그것도 선발사업자인 SK텔레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조 사장은 "선발업체가 CID요금을 무료화했기 때문에 경쟁상황을 감안해서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CID요금에 대해 적정선 인하를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조 사장은 CID를 포함한 이동전화요금 인하를 놓고
지난 1957년 설립된 신일건업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간혹 신일하면 선풍기회사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부채비율이 140% 이내일 정도로 아주 건실한 업체다. 이런 신일건업이 최근 변신을 시도하고 나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변화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홍범식 대표이사 부회장. 홍 부회장은 "아주 역동적인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라면서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통해 새로운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변신을 위해 신일건업은 조만간 회사명을 포함, CI작업을 새롭게 할 계획이다.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아파트 브랜드인 '신일유토빌'에 대한 인지도 강화 차원에서 홍보작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방침이다. 변화의 바람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조직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게 홍 부회장의 설명이다. '제2의 창업'을 선언하고 일류 종합건설회사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신일건업 홍범식 부회장의 의견을 듣는다. - 신일건업은
[머투초대석]현대카드 정태영사장 현대카드 본사 사장 접견실은 조용한 커피숍을 연상케 한다. 쿠션이 놓여 있는 편안한 소파와 아기자기한 소품들. 한쪽 벽면은 책꽂이로 장식하고 누구든지 와서 음료수를 꺼내 마실 수 있도록 냉장고가 비치돼 있다. 비서가 내놓는 메뉴판도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이 방의 주인은 사장이 아닌 직원 모두라는 것을 무언으로 말하고 있다. 정태영 사장(45, 사진)은 2003년 카드업계 최고의 히트상품인 `현대카드M'의 성공적인 런칭을 주도하며 탁월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대표이사다. 지난해에도 `알파벳 마케팅'을 전개하며 업계의 시선을 끌었고, 톡톡 튀는 현대카드의 광고만큼이나 젊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최고경영자(CEO)로 정평이 나있다. 외모부터 금융회사 CEO라기보다는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같은 정 사장은 말투도 거침없고 솔직하다. 영화를 공부한 적이 있는 그에게 취미를 물어보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영화를 즐겨보긴 하지만 영화를 볼 때
[머투초대석]현대카드 정태영사장 "현대카드는 젊습니다. 따라서 신선한 아이디어가 넘치지요. 최고경영자(CEO)로서 뿌듯한 점은 직원들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비해 아이디어도 많이 내고 표정도 밝아졌습니다. 이러한 점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현대카드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젊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만큼 흡인력도 강해 올 상반기 신용판매액 점유율이 10%를 넘어설 정도로 고성장을 하고 있다. 신용카드 같지 않은 미니카드, 투명카드 등 내놓는 것마다 신선함이 묻어난다. 게다가 현대카드는 지난 8월 세계적 그룹인 제너럴일렉트릭(GE)과 손을 잡았다. 카드업계를 비롯한 금융계에서도 주목할 만큼 GE와의 제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로 인해 현대카드는 자금조달이 용이해져 재무구조가 건실해지고 대외신인도도 높아지는 등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카드업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사진)을 만나 현대카드의 목표와 비전을 들어봤다. ―10월9일 현대카드 창사기념
어떤 이는 그를 '글로벌 엘리트'라고 부른다.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간 이민 1.5세대,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의 로펌 변호사, 베어링스증권 한국지점 부지점장, 이제는 SEI인베스트먼트 한국법인의 대표. 어떤 이는 그를 '배당주 펀드의 원조'라고 부른다. 한 운용업계 관계자는 "배당주 펀드가 어려울 때 만들어 성공시킨, 소신 있는 분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선 묘하게도 그런 평가에 흔히 따라 붙는 질시가 느껴지지 않는다. 곽태선 세이에셋코리아자산운용 사장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어떤 운용사 이사는 "(곽 사장을 만나다니) 좋겠다, 소신 발언을 한 배경에 대해 좀 물어봐달라"고 말했다. 최근 곽 사장은 "주식시장에 활황일 때 주식거래 차익에 세금을 매기자"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담 진행 중 "곽 사장이 업계에서 인기가 많다"고 전하자 세이에셋코리아의 모 임원은 "같이 일해보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하며 눈을 찡긋하고 웃는다. 자신의 사장 앞에서 말이다. 곽 사장이
서울 을지로 삼성화재 본관 7층,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칸막이 하나 없이 탁 트인 사무실이 눈에 들어온다. 책상 사이 널찍한 공간으로 회전의자들이 도르륵, 도르륵 굴러다닌다. "이사님, 지난주 00증권 판매 동향을 보니까요..." "양 팀장, 저번에 돌려보던 캐피탈 그룹 책 말이야." 사무실에 벽이 없으니 대화에도 벽이 없다. 몸만 돌리면 바로 회의 공간이 되는 이곳은 세이(SEI)에셋코리아자산운용, 13년 간 전체 수탁액 150배 성장의 신화가 탄생한 곳이다. 1991년 에셋코리아만 해도 200억여원에 지나지 않던 수탁액은 9월 22일 기준 1조8500여원, 일임 포함 3조원으로 급증했다. 미래에셋계열과 합병 운용사를 제외하고는 업계 최고 속도의 성장세였다. 돌풍의 근원지는 세이에셋고배당주식, 고배당밸런스드60주식혼합, 고배당혼합 등 고배당펀드 시리즈. 9월 초 판매가 재개된 이 시리즈로만 22일까지 1400억여원의 자금이 밀려들어왔다. 세이에셋이 일으킨 돌풍은 업계 판
지난 7월부터 8월말까지 부동산정책 당정협의회가 열리는 매주 수요일 밤 열린우리당의 안병엽 부동산정책 기획단장은 온갖 TV 방송과 신문에 얼굴을 내비치며 당정협의회 결과를 발표했다. 안 단장은 지난 6월초 우리당의 부동산정책 기획단장을 맡은 이후 여름 내내 부동산과 관련한 당내 의견을 수렴, 당의 부동산정책을 세우는 총지휘자로 바쁘게 지냈다. 각 부문 부동산 전문가를 초빙해 11차례의 간담회를 개최했고 각계각층의 여론을 듣기 위해 2차례의 공청회를 열어 부동산정책의 큰 방향을 만들어나갔다. 안 단장은 8.31 부동산 종합대책이 "투기억제와 공급확대의 두 측면을 모두 갖췄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단기처방에 그칠 것이라는 의심을 보이고 있지만 "중장기적인 수급까지 모두 고려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믿어도 좋다"고 강조했다. ―우선 8.31대책의 산실 역할을 한 부동산정책 고위당정협의회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당정이 합의해서 마련한 8.31대책이 제대로 집행이 되는지, 부동산시장이 기
"모두가 다 백화점식 영업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와이셔츠와 남방만 파는 곳도 있고 신발만 파는 데도 있습니다. 우리는 수산업, 해양금융에서 강자가 되겠습니다." 수협은행은 `블루오션'과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수산 전문 은행으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산업이 주된 시장이라는 점이 그렇고, 금융권 블루오션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는 `교회대출'의 개척자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수협은행이 해양금융에서 새로운 블루오션을 모색하고 있다. 2001년 생사의 기로에서 공적자금 1조1581억원에 기대야만 했던 수협은행은 각고의 노력으로 4년 연속 흑자를 달성했고 사상 최대 순익을 잇따라 경신하며 수산업 전문은행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이제 해양금융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지난 4년여 수협은행 부활을 이끌고 이제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장병구 수협은행장(사진)을 만나 수협은행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두번째 임기가 5개월째 접
장병구 수협은행장은 주요 시중은행장 인사 때면 빠지지 않고 하마평에 오르내릴 만큼 금융권에서는 알아주는 실력파다. 2002년에는 이강원 현 한국투자공사(KIC) 사장과 함께 외환은행장 최종 후보에 올랐고, 지난해 있었던 우리금융 회장, 국민은행장 인사에서도 최종단계까지 경합을 벌였다. 이런 시중의 평가는 외환은행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한 뒤 수협은행장직을 맡아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던 수협은행을 회생시킨 그의 경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장 행장은 충북 단양 산골 농부의 아들(4남2녀 중 3남)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부모의 품을 떠나 고학을 하다시피했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외환은행에 들어갔다. 30여년을 `외환은행맨'으로 보내면서 뉴욕지점 차장, 종합기획부장 등 요직을 거쳐 2000년 3월 부행장직에 올랐다. 그리고 그해 11월 수협은행장직을 맡아 수협은행과 인연을 맺는다. 장 행장 취임 당시 수협은행은 IMF 외환위기 과정에서 1조원에
스튜어트 솔로몬 사장실 입구에는 한국의 전통 고가구가 놓여 있다. 사장실에 들어가면 더 오래된 고가구가 장식장 노릇을 하고 있다. 평양에서 가져왔다는 한 고가구 위에는 고려청자처럼 생긴 도자기가 놓여 있다. 도저히 파란눈의 미국인 사장실이라고 믿기 힘들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은 물론이고 한국의 문화, 그중에서도 도자기에 조예가 깊다. 도자기는 직접 만들어보기까지 했으나 어려워서 관뒀다고 할 정도. 한국의 많은 예술품이 외국으로 넘어간 데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국내 글로벌 기업의 외국인 최고경영자(CEO) 중에서도 단연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알아주는 지한파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34년 전인 1971년. 뉴욕 시러큐스대를 졸업한 직후 평화봉사단(Peace Corps)으로 한국을 위해 봉사한 이래 한국과의 인연을 유지해왔다. 당시 한국어를 혹독하게 배운 덕분에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됐다고. 이후 79년부터 95년까지 16년 동안 외환은행 뉴욕지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