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한 다음부터 꽃을 가꾸는 일이 어느덧 취미 비슷한 것이 되었다.
물이나 주는 정도니 가꾼다는 말을 좀 그렇고 그저 사들이고 옮겨심는 수준이다. 올봄에도 아내와 함께 가까운 농원에 나가 꽃을 샀다.
장미와 수국 같은 화려한 꽃부터 수선화와 데이지, 상사화 같은 청초한 꽃들까지. 더러는 화분에 모아두고 더러는 심어 꽃밭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들여온 것이 튤립과 양귀비였다.
기품 있는 청록색 꽃대에 야무지게 봉오리를 맺고 있는 튤립은 단연 꽃 중의 귀족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서 잘 보이는 곳에 모셔놓았다. 아편을 만든다는 양귀비는 난생 처음 보는 꽃이라 호기심은 갔지만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맥없이 퍼져 있는 풀포기에 검은 털이 숭숭거리는 꽃봉오리가 허접하고 볼성사나웠다. 사는 것은 아내 권한이지만 심는 것은 내 몫이라, 양귀비 포기들은 마당 귀퉁이 후미진 곳에 심어두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것은 바로 그 양귀비들이었다. 무거운 머리통을 힘겹게 이고 있던 꽃대 하나가 꼿꼿하게 일어서는 것 같더니, 봉오리의 껍질을 퉁겨내며 붉은 꽃 한 송이를 토해놓았다.
샛노란 꽃술과 선홍색 꽃잎이 그린 듯 화사했고, 한지 같고 습자지 같기도 한 질감이 만지면 바스락거릴 듯했다. 가까이 코를 대보니 슬쩍 향기까지 흘렀다. 요염하다는 단어는 양귀비꽃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첫 번째 붉은 꽃을 신호탄으로 다른 포기들도 연이어 꽃을 피워냈다. 두 번째는 하얀 꽃, 세 번째는 노란 꽃. 양귀비꽃이 붉은 색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게다가 밤새 꽃을 피우는지 아침이면 한 송이씩 새 꽃을 보여 주었다. 그때마다 우리 마당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실내에 모셔둔 튤립들은 닷새가 되지 않아 꽃 모양이 무너져 갔다. 워낙 단정하고 기품 있었던 꽃이라 망가지는 모습이 더 참혹했다. 가까이서 보기가 괴로워서 담장 밑에 옮겨 심었다. 멀리서 보니 그런 대로 괜찮다고, 꽃이 지더라도 정갈한 잎새가 있지 않으냐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양귀비꽃은 꽃잎을 뚝뚝 떨구며 지는 모습도 장렬했지만, 튤립의 최후는 도무지 귀족의 풍모에 어울리지 않았다. 야무졌던 꽃봉오리가 벌어져 거꾸로 휘어지더니, 축 늘어지다 못해 배배 꼬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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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처럼 목련처럼 팔다리를 내던지며 산화하기를 바랐지만, 튤립은 내 기대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일주일 넘게 그 상태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색깔은 매일 조금씩 바래지고 몸은 조금씩 비틀려지면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보니 실낱같은 감동이 묘하게 내 마음을 스쳐갔다. 미모는 어차피 한 순간이고 인생 허망한 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라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연말 정산에 쓸 영수증 챙기며 사는 날까지는 제 나름 열심히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거 아닌가. 벌레들의 윤리를 실천하는 귀족이라니, 이건 참 굉장한 영웅주의가 아닌가.
양귀비와 튤립 때문인지 꽃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총선을 전후해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들 보다보니 더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요즘 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고 아내가 칭찬을 해주었다.
그게 다 꽃을 가까이 한 덕이 아니겠냐고 대답하다가 칭찬에 고무되었는지 내 입에서 문득, 꽃 가꾸기야말로 사나이로 태어나서 해볼만한 게 아니겠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딴에는 아이러니를 구사한 것인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수컷 기질들을 내세우며 여기저기서 이김질이나 하는 것보다는 꽃을 가꾸는 것이 세계 평화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닌가, 정치 같은 하찮은 일들은 온화하고 꼼꼼한 여성들에게 맡기고 꽃밭에서 심성을 매만지는 것이 사회 전체의 적대적 긴장 강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서는 우주의 기의 소통을 원활케 하는 것이 아닌가, 국가나 민족 같은 옹색한 거 말고 이렇게 세계나 우주 같은 차원의 일이라면 어떤가,
웅지를 품은 사나이가 능히 뭔가를 걸 만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늙은 튤립의 눈초리가 겸연쩍어 씽끗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