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에세이]시인은 죽었다

[MT에세이]시인은 죽었다

서영채 한신대 교수
2008.06.2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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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시력이 30년이 가까운,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그가 이제 시는 그만 써야 될 것 같다고 해서 놀랐다. 50줄 시인의 절필 선언이라니 낭만적이기엔 좀 늦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를 좌절시킨 것은 촛불집회에 등장한 수많은 팻말들이었다고 했다. 중고등학생들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들까지, 정부의 쇠고기 협상과 대통령의 행태에 대해 어떻게 저렇게 적절한 비유와 풍자와 유머를 구사하는지, 그 톡톡 튀는 수사가 도무지 자기로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인들 엄살 심한 것이야 이미 아는 터, 뭘 그렇게까지 말하느냐고 하자, 대뜸 내게 ‘명박산성’을 아느냐고 물었다. 세종로를 점거했던 그 웅장한 콘테이너들?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도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에 떨친 그 독창적이고 대범한 아이디어를 모를 수는 없다.

문제는 청와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그 콘테이너들이 아니라 거기에 순간적으로 나붙은 ‘명박산성’이라는 이름이라고, 그 발상의 참신성과 상상력의 순발력이라고, 그런 감수성을 지닌 독자들을 상대로 자기가 무슨 시를 어떻게 쓰겠느냐고 했다. ‘명박산성’이라는 명명식이 거행된 그 날은 자기뿐 아니라 한국의 시인들 모두에게 사망선고가 내려진 날이라고도 했다. 대한민국 시인들 다 죽었다.

열띤 어조로 쏟아지는 그의 말 속에 파묻혀 있다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절망에 관한 이야기인데 저렇게 신나고 기운차게 말해도 되는 건가 싶어 슬쩍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 아무리 시인이지만 자의식이 지나친 게 아니냐고. 하지만 그는 이미 자기 시 이야기는 관심 밖이고 광장에서 보았던 촛불들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가 며칠 동안 광장에서 보았던 남녀노소 갑남을녀들의 자유롭고 유쾌한 모습들, 귀여운 촛불 소녀들, 집행부도 중심도 없어서 경찰로서도 도무지 그 행로를 예측하기 어려웠다던 시위대의 행렬, ‘명박산성’을 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다섯 시간 가까이 격론의 현장을 연출했다던 시민 토론회의 열기, 분노와 조롱의 수준을 넘어 마침내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어버린 공권력의 운명과, 여론의 향배를 일거에 돌려버린 다양한 개인 미디어의 출현 등등에 대해.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도 현하의 달변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런 일들은 마치 자기 혼자만 아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그가 덧붙인 말은 이랬다. 이제야 비로소 이 나라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고.

사실은 나도 그랬다. 나도 그날 대한문 앞 세종로 한복판에, 촛불 한 자루 켜놓고 아내와 함께 중앙선을 깔고 앉아 있었다. 머리 위의 신호등에서는 노란불이 연신 껌벅거리고 있었다. 광장에 함께 나가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단체의 일원으로 깃발 세우고 가는 것보다는 아내와 함께 단출하게 나가는 쪽이 마음에 들었다.

연좌는 했으나 막상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대열 앞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단상은 워낙 멀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껌벅거리는 신호등을 바라보다가, 앞에서부터 촛불의 물결이 몰려오면 리듬에 맞춰 촛불을 들다가,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간신히 끝 부분 정도나 따라 웅얼거리거나 할 뿐이었다.

이번 촛불 집회에서 알게 된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반복해서 부르다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5공화국 시절부터 그렇게 싫어했던 국민이라는 말이 나쁘지 않게 들려 신기했다. 멀리 프레스 센터 건물 옥상에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사진기자들이겠지 싶었다.

문득, 어둠이 짙어진 대열 중에서 혼자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대문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앞에도 뒤에도, 나를 완벽하게 포위해버린, 아, 아름다운 촛불의 강물이었다. 돌아가는 길엔 이 나라가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의 변화가 놀라웠다. 시인이 자신의 절필 선언을 자기도 모르게 기꺼워했듯이 나도 내 그런 마음을 용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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