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뉴스 보기 싫어서 축구 영상만 찾아봐요."
30대 직장인 이모씨는 지난 12일 한국 축구 대표팀의 조별리그 체코전 이후 퇴근길마다 유튜브와 SNS(소셜미디어)에서 월드컵 영상만 찾아보고 있다. 당초 큰 관심이 없었던 월드컵이 어느새 일상의 즐거움이 됐다. 19일에는 멕시코전을 실시간 시청하기 위해 연차 휴가까지 냈다.
6·3 지방선거 이후 쏟아지는 정치 기사에 피로감을 느낀 시민들의 관심이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으로 쏠린다. 진영 갈등과 대립이 이어지는 정치 이슈와 달리 월드컵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의 몰입을 이끄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씨는 "체코전 당일 출근길에 빨간 옷 입고 응원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별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며 "그런데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경기를 함께 보고 이야기하다 보니 재밌더라. 골 들어갈 때마다 짜릿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지방선거 기사를 2주 넘게 보다 보니 정신적 피로감이 컸다"며 "지금은 다른 나라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까지 챙겨 본다. 잘 몰랐던 해외 선수들이 활약하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 SNS 팔로우도 했다"고 말했다.
현재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인한 개표소 봉쇄 시위가 이어지는 등 후폭풍이 거센 상황에도 온라인상에서 월드컵은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월드컵 관련 검색량 지수는 체코전이 열린 12일 최고치인 100을 기록한 뒤 일시적으로 감소했다가 다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유튜브에서도 관심 이동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구글 트렌드의 유튜브 검색 데이터를 보면 선거 관련 검색량 대비 월드컵 관련 검색량은 11일 기준 11배에서 체코전 당일 50배로 벌어졌다. 키워드 분석 플랫폼 '블랙키위'에서도 이달 18일까지 월드컵 관련 검색량이 지난달 대비 2407.78% 급증하며 대중 관심사가 빠르게 이동했음을 보여줬다.
재택 근무하는 40대 프리랜서 박모씨도 정치 뉴스 대신 축구에 빠져들었다. 박씨는 "월드컵이 시작된 이후로는 정치 뉴스를 거의 보지 않는다"며 "아침에 눈 뜨자마자 TV부터 켠다. 이번 월드컵은 경기마다 재밌다. 음바페, 홀란, 메시가 연달아 골 넣는 장면을 보니 도파민이 터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평일 오전 시간대 경기로 흥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유통·외식업계는 '월드컵 특수'를 누리고 있다. 월드컵 개막일인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무신사 스토어 내 '축구 유니폼' 검색량은 전주(6월 5~7일) 대비 113% 증가했다. 특히 '대한민국 유니폼'과 '국대 유니폼' 검색량은 각각 6배 늘었다.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서도 지난 8~15일 '월드컵 응원' 검색량이 전주(5월 31일~6월 7일) 대비 1918% 급증했다. '국가대표 유니폼' 검색량도 275%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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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소비도 크게 늘었다. 배달의민족에 따르면 체코전 당일 킥오프 직전인 오전 10~11시 주문 건수는 전주 같은 시간대 대비 90.6% 증가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치킨 주문량은 875.7% 폭증했다.
주문량 증가는 오피스 상권에서 더 두드러졌다. 광화문(115%), 여의도(71.3%), 을지로(58.5%) 일대 주문량이 크게 늘었으며 대학가 상권도 51.5% 증가했다. 사무실과 캠퍼스에서 단체 응원에 나선 수요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월드컵 열기의 배경에 정치적 갈등과 그에 따른 피로감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지방선거가 진영 대립과 갈등을 부각했다면 월드컵은 승패를 함께 경험하며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하는 '통합의 장'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스포츠 열기를 넘어 90분간의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사회적 치유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이다.
실제 연관어 긍·부정 분석 결과 지방선거에는 '피로', '진흙탕', '부실' 등 부정적 표현이 주로 등장한 반면 월드컵 관련 키워드에는 '재밌다', '감동', '즐기다' 등 긍정적 표현이 주를 이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이 강하기 때문에 월드컵이라는 긍정적 자극만으로 갈등이 쉽게 사그라들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경기 승리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편 가르기는 인간 본성이지만 월드컵은 정치적으로 갈라진 집단도 하나로 통합한다"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월드컵을 통해 '우리'가 된다. 대치하는 게 아닌 협동과 연대를 경험하면서 사회적 대립을 줄이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