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기사를 취재할 때 항상 듣는 말이 있습니다. "이 자리는 모부처 자리니 그 출신 중에서 후임자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성장시대부터 굳어진 전관예우 같은 불문율인데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없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유지되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흔히 '낙하산인사'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산업은행 총재자리도 그런 불문율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은 총재 자리는 1954년 설립된 이래 50여년 간 줄곧 관료출신 인사가 수장을 맡아왔습니다. 주로 재정경제부 출신으로 차관급을 지낸 인사 중 낙점이 됐습니다. 이번에도 산은 총재 후보는 김광림 전 재경부 차관, 양천식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김창록 금융감독원 부원장, 신동규 수출입은행장, 이윤우 산업은행 부총재 5명으로 압축돼 있습니다. 모두 옛 재무부 혹은 재정경제부 출신이고 내부인물로 후보에 오른 사람은 이윤우 산은 부총재뿐입니다.
물론 출신이 능력을 가르는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관료 출신이면서도 뛰어난 리더십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분도 많습니다. 조직이 위기에 처할 때는 조직원 스스로 영향력 있는 관료 출신자를 수장으로 선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번 산은 총재자리에 처음부터 관료 출신자가 당연시돼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산업은행 출입기자로 산은 분위기를 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사기가 꺾인 것을 많이 봅니다. 최고경영자(CEO)는 조직원의 꿈이기도 한데 그것이 원천적으로 안된다고 생각하니 `나의 한계는 여기구나'라는 자조적 분위기가 많이 스민다는 겁니다. 특히 산업은행은 설립 이래 50년 간 외부 관료 출신자가 수장으로 임명되는 관례가 누적되다보니 더욱 그런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산업은행은 이제 자산 100조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간 정책금융을 실천하는 국책금융기관의 맏형으로 금융시장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왔습니다. 그러나 정책금융기관의 역할도 줄고 급한불 끄는 위기관리자로서의 역할도 축소된 요즘 산업은행은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보고 그것을 위해 노력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산은 총재의 평균 임기는 18개월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관료 출신이 잠시 거쳐가는 정도로 평가되는 이런 짧은 임기로는 산은의 앞날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기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산은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 산은 내부를 속속들이 아는 내부인사가 총재 적임자라는 주장에 주목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공기업 수장에 민간인 전문 CEO가 선임되는 등 변화와 혁신바람이 불고 있는 시기에 산은 총재자리에도 내부인사가 전격기용돼 산업은행 50년 역사에 새바람이 불지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