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전스시대, 網이 경쟁력이다(상)-1]규제의 틀이 달라진다
세계에 걸쳐 통신서비스가 '격동의 세월'을 맞고 있다. 유선과 무선, 통신과 방송이 융합되는 추세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하면서 세계 각국은 통신서비스 컨버전스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규제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분주하다.
우리 정부도 이 같은 추세에 발맞춰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올 초 유·무선으로 대별됐던 전송서비스를 하나의 역무로 통합하는 것을 골자로 한 '통신규제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은 매우 획기적이다. 7개 기간 역무마다 따로 규제하던 '수직규제' 방식이 역무에 상관없이 동일방식으로 '수평규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규제의 틀이 바뀌면 인터넷 접속서비스, 즉 초고속인터넷 허가를 받은 사업자가 별도의 허가절차 없이 인터넷전화(VoIP), 시내전화 등 제반 전송서비스를 모두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관련 법 개정으로 무선까지 같은 역무로 묶이면 단 한번의 허가로 이동전화까지 서비스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칸막이'식 규제만 철폐한다고 해서 유·무선 컨버전스시장에서 서비스 경쟁이 촉진되는 것은 아니다. 수직규제가 수평규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동일서비스 동일규제'란 원칙이 통하는 시장조건이 전제돼야 하고, 진입규제도 대폭 완화돼야 한다. 마치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달리기를 하려면 동일한 조건부터 만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경쟁 촉매제 '재판매와 결합판매'
정통부가 지난 5월 KT와 SK텔레콤 같은 지배적 사업자의 결합상품 할인판매를 허용한 데 이어 최근 KT와 SK텔레콤을 대상으로 '재판매 의무화법'을 입법 추진하는 것도 '수평규제 전환'을 앞둔 선행조치로 이해된다. 지배적 사업자가 결합판매시장에 뛰어들면 후발업체의 경쟁조건은 당연히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불리한 조건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소매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재판매 의무화법을 통해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도매규제를 새로 도입하려는 것이다.
정통부의 이런 규제철학은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다. 영국 유럽 일본 미국 등 세계 각국은 소매규제를 없애고 도매규제로 경쟁제도를 개선해나가고 있다. 세계 각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단순히 가격경쟁을 촉진, 소비자 후생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만 있는 것일까. 가격경쟁은 궁극적으로 설비기반 경쟁을 수반한다. 그런 관점에서 각국의 규제정책 변화는 궁극적으로 소비자 후생과 설비기반 경쟁을 동시에 거머쥐는 '2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전략이다.
정통부 역시 '2마리 토끼'를 노리고 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7월1일자로 지배적 사업자의 결합상품 할인판매가 허용됐지만 시장의 반응은 무덤덤한 상태고, 재판매 의무화법은 부처 협의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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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선 칸막이 규제가 없어진들 아무 장애 없이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사업자는 얼마나 될까. 유선과 무선을 교차진입하면서 서비스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단일사업자는 아마도 KT뿐일 것이다. KT 결합상품이 그나마 유선과 무선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것도 이런 조건 때문이다.
유선전화와 초고속인터넷, TV포털 '하나TV'까지 세트상품으로 결합판매하는 하나로텔레콤은 이동전화 상품이 없다. KTF와 재판매 협상을 진행 중이지만 의견차가 커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SK텔레콤도 일부 종합유선방송(SO)과 제휴하고 이동전화와 결합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지만 SO 자체가 전국 사업자가 아니라서 전국단위 판매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재판매다. 부족한 상품은 사업제휴로 메워서 결합판매할 수도 있지만 재판매만큼 효과적이고 확실한 대안은 없다. 주파수를 빌려야 하는 이동전화는 직접진입 자체가 불가능하고, 가입자망이 없는 상태에서 시내전화와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할 순 없는 일이다.
재판매는 도매시장을 뜻한다. 망(주파수)을 가진 사업자가 망이 없는 사업자에게 망을 빌려주고 적정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사실 망을 빌려주지 않겠다면 그만이어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 마련한 것이 바로 '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재판매 의무화법'이다. KT의 시내전화와 초고속인터넷 그리고 SK텔레콤의 이동전화를 의무적으로 재판매토록 강제한 법이다.
재판매법은 통신망이 없어도 이동전화나 초고속인터넷, 시내전화시장에 누구나 진출할 수 있도록 진입장벽을 없앴다. 은행, 증권, 홈쇼핑, 주유소, 자동차회사 등도 재판매를 통해 이동전화시장에 충분히 진출할 수 있다.
◇광대역통합망(BcN)을 위한 도매규제(?)
정통부가 결합판매나 재판매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경쟁 활성화를 통한 요금인하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판매는 도매사업자인 망사업자에게 '망 사용대가'를 수익으로 안겨주기 때문에 망투자를 견인하는 효과까지 있다. 정통부는 과연 '2마리 토끼' 사냥에 성공할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2010년 말 구축 완료를 앞둔 BcN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업 완료시점을 불과 3년여 남겨둔 BcN은 그야말로 유선과 무선, 방송(지상파TV 제외)까지 하나의 망으로 통하는 차세대 통신서비스다.
정통부가 '전송서비스'와 '정보서비스'로 규제의 틀을 개편하려는 것도 현행 규제방식으로는 BcN 환경에서 통신서비스를 규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무선 경계가 허물어진 BcN 환경은 모든 서비스가 하나의 망으로 전송되기 때문에 역무별로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통부의 '통신규제 로드맵'은 결국 이런 BcN 환경에 대응, 소매규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재판매 의무사업자에 대한 도매규제만 한다는 게 골자다. 그렇다면 이용자 차별행위나 공정경쟁 저해행위 처벌 같은 사후규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BcN 환경에서 재판매 의무사업자에 대한 도매규제만으로 경쟁을 촉진할 만한 근거는 있는 것일까.
인터넷(ALL-IP) 기반의 BcN망은 사실상 유비쿼터스를 의미한다. 홈네트워크, u시티, u헬스 등을 실현하는 데 BcN망에 물려있는 모든 디바이스에 차세대인터넷주소체계(IPv6)가 부여되고, 사물과 사람은 물론 사물과 사물끼리도 통신이 가능해지면서 유·무선 구분은 더이상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그런 관점에서 BcN의 핵심은 바로 초고속인터넷이다. 집집마다 뻗어있는 가입자망은 '혈관'인 셈이다. 현재 BcN 시범사업자는 KT SK텔레콤 LG데이콤 케이블TV사업자연합이다. 초고속인터넷 '혈관'이 있느냐 없느냐가 BcN 경쟁을 좌우한다고 보면 현재의 '통신규제 로드맵'은 분명 지금의 시장경쟁 구도를 크게 바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는 보인다. 그 한계가 무엇이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우리가 당면한 '경쟁 활성화'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