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서있던 영국이 미국에게 그 지위를 물려준 것은 20세기 들어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세계의 정치·군사적 패권과 경제적 실리를 차지하자 미 달러화가 영국 파운드화를 대신하여 자연스레 세계의 기축통화가 됐다.
기축통화란 화폐가 갖는 계산의 단위, 교환의 매개, 가치의 저장수단과 같은 고유 기능들이 국제 무역이나 금융 거래에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통화이다. 현재 미 달러화는 통화의 가치를 나타내는 각국 환율의 척도가 되고 있다. 전 세계 무역거래가 상당 부분 미 달러화로 결제되고 국제 자본 및 금융거래에도 미 달러화 표시 채권발행과 외환거래 등에서 달러화비중이 가장 높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이 비상금으로 보유하는 외환보유액 중에서 미 국채 등 달러화표시 자산 비중은 약 60%에 달한다. 그 결과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연준)가 발행한 달러화의 약 2/3는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런 덕분에 미국은 그동안 기축통화국으로서 과도한 특전을 누려왔다. 화폐주조비용을 들여 종이를 큰 액면가치의 지폐로 바꾸면서 시뇨리지(화폐주조차익)를 누리고 있다. 미국의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는 다른 나라들이 사주는 미국채 등으로 보전돼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인데도 위기 직후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국제자금이 미국으로 몰려들며 미 달러화 가치는 반년간 강세를 보였다. 세계 경제 초유의 난리 속에 그래도 믿을 것은 달러뿐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글로벌 위기로 실물경제 침체가 깊어지자 미 연준은 달러화를 대규모로 찍어내는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자국경제의 회복을 우선적으로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기축통화의 혜택을 공유하고자 유럽국가들도 일찍이 2000년에 유로화를 출범시켰다. 한때 국제 마약거래상도 미 달러화보다 유로화를 선호한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유럽재정위기 여파로 유로화가 힘을 잃고 있다. 세계 3대 국제통화로 꼽히는 일본 엔화도 국제금융거래에서 차지하는 위상에서 미달러화를 넘보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근 무역거래에서 위안화를 결제통화로 적극 추진하고 있는 중국은 자본시장 개방과 금융시장 성숙도 면에서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런 점에서 현재로서는 미 달러화를 대체할 기축통화가 뚜렷이 없다는 점에 이론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 달러화의 권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 미국은 국제통화체제의 안정을 위해 기축통화국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필자는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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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경제를 둘러싼 상황은 미 달러화의 안정성과 신뢰를 손상시키고 있다. 쌍둥이 적자 등 미국의 구조적 문제 해결은 뒤로한 채 재정적자 보전과 경기부양을 위해 대규모 국채발행이 불가피하고 미 연준은 돈을 찍어 이를 지원하고 있다. 실물경제의 가시적인 회복 지연 못지않게 양적완화 종료와 정책금리 정상화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는 사이 미달러화의 가치는 하락하고 신뢰에는 금이 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양적완화 이후 풍부해진 글로벌 자금이 신흥국으로 흘러들어가 자산버블을 일으키더니 올 들어 출구전략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다시 대거 유출되면서 신흥국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을 교란시키는 주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미국은 재무부의 환율보고서를 통해 각국 환율정책에 대해 고작 구태의연한 압력이나 행사하고 있다. 미국은 발등에 떨어진 자국의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기축통화국으로서 국제금융체제의 안정에 힘쓸 여력과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미 달러화에 대한 신뢰상실은 배리 아이켄베리 UC버클리대 교수의 경고처럼 각국이 외환보유액으로 가지고 있는 미 국채의 투매로 이어져 ‘달러제국의 몰락’을 재촉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껏 누려온 기축통화의 특권은 미국 경제와 달러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바탕이 돼야 가능하다는 점을 미국이 잊고 있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