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막힌 IPO] (下)
'절차보다 정치가 앞서면'…IPO 위축에 기업 성장까지 발목

SK하이닉스가 미국 반도체 계열사 솔리다임의 기업공개(IPO) 검토를 중단하면서 정치권의 압박이 기업의 자금조달과 자본시장에 미칠 영향이 논란이 되고 있다. 주주가치 보호를 위한 제도와 절차가 마련돼 있는데도 정치권의 공개적인 반대와 금융당국의 규제 판단이 기업의 상장 추진에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IPO 검토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주주보호 절차 있는데…정치권 압박 속 IPO 철회
2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이날 솔리다임의 상장 전 투자유치(프리IPO)와 IPO 검토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최근 자본시장 여건과 주가 흐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솔리다임의 성장 가능성과 투자 필요성에는 변함이 없다며 향후 자금조달 방안을 계속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번 결정에 앞서 국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솔리다임 상장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기존 주주의 지분가치 희석과 중복상장에 따른 기업가치 할인 가능성이 주요 이유였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9일 국정감사에서 솔리다임 상장이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에 저촉된다고 밝혔고, 이억원 금융위원장도 22일 가이드라인 적용 대상이라는 입장을 확인했다.
주목할 부분은 이미 중복상장에 따른 주주보호 여부를 판단할 제도가 마련돼 있다는 점이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는 지난 8월 3일부터 중복상장 원칙적 금지, 예외 허용 제도를 시행했다. 모회사 이사회가 주주에게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보호방안을 마련한 뒤 주주 의견을 확인하도록 하는 등 5대 의무를 규정했다.
이는 모든 중복상장을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제도가 아니다. 모회사 주주에게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 주주보호 요건을 충족하면 예외적인 상장도 허용하는 구조다. 특히 기업의 사업자금 조달 필요성을 고려해 물적분할 자회사와 인수·신설 자회사에 서로 다른 주주동의 기준을 적용했다.
솔리다임은 미국 상장을 검토한 만큼 한국거래소의 국내 상장심사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모회사인 SK하이닉스 등에 주주보호 의무가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체적인 상장 조건과 주주보호 방안에 대한 최종 판단이 이뤄지기도 전에 기업이 상장 검토를 중단한 것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모든 중복상장이 모회사 주가 하락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며 "상장 구조와 자금 활용 방안, 주주 보호 방안 등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이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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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번 철회가 정치권의 압박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SK하이닉스는 시장 여건 등을 결정 이유로 제시했다.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에 대한 정치권의 문제제기 역시 정당한 감독 활동에 해당할 수 있다. 다만 제도적 판단이 마무리되기 전에 공개적인 상장 재검토 요구가 집중됐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개입이 기업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해외 연구서도 불확실성에 IPO 감소…시장 자율성 위축 우려
정치적 압박이 반복될 경우 더 큰 문제는 기업들이 정해진 절차를 통해 상장 가능성을 검증하기보다 논란 자체를 피하려 IPO 추진을 포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장 여부를 결정하는 데 제도적 기준뿐 아니라 정치권의 반응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자금조달 계획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주주가치에 미치는 영향도 상장 여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자회사 신주 발행으로 모회사 지분율이 낮아지더라도 외부자본 유치로 사업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반대로 별도 상장에 따른 기업가치 할인이 자금조달 효과보다 클 가능성도 있다. 결국 공모가격과 지분 희석 규모, 조달자금 사용처, 성장에 따른 이익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
정치적·경제적 불확실성이 기업공개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은 해외 실증연구에서도 확인된다. 2023년 국제학술지 '파이낸스 리서치 레터스'(Finance Research Letters)에 발표된 연구는 1990년부터 2021년까지 52개국에서 이뤄진 IPO 7만760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IPO 건수와 자금조달액이 모두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해당 연구는 국가의 제도적 역량이 우수할수록 불확실성이 IPO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완화된다고 분석했다. 불확실한 환경에서도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는 제도가 기업의 자금조달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기업의 증권신고서가 공시 및 회계 요건을 충족하는지 심사하지만 해당 거래의 경제적 타당성이나 투자자에게 적합한 투자 여부를 판단하지는 않는다. 정보공개에 대한 감독과 투자에 대한 경제적 판단을 구분하는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IPO는 증권 관련 법령과 거래소 상장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국내 중복상장 규제 역시 일반주주 보호라는 별도의 목적이 있다. 다만 시장참여자가 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경제적 효과를 평가하고 정해진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기업들이 정치적 논란을 우려해 IPO를 회피한다면 자금조달 수단이 줄어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투자자 역시 기업의 성장성과 위험을 평가해 투자 여부를 결정할 기회를 잃을 수 있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사업에 필요한 자본이 배분되는 자본시장의 기능도 제약받을 가능성이 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이 수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 기업에 직접 투자하거나 상장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것인데 국내 기준과 여론에 가로막혀 제동이 걸리는 것 아닌가 우려된다"며 "당국이 해외로 확장하려는 기업들, 해외에 상장하려는 기업들의 경우 어떤 부분이 중복상장 기준에 저촉되는지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장 멈춰도 투자는 해야…SK하이닉스, 솔리다임 자금조달 숙제

SK하이닉스(1,273,000원 ▼4,000 -0.31%)가 솔리다임의 기업공개(IPO) 검토를 중단하면서 생산능력 확충을 위한 투자재원 확보가 과제로 떠올랐다. 중복상장에 따른 주주가치 훼손 우려는 덜었지만, 대체 자금 조달에 따른 비용과 주력 사업의 투자재원 배분을 함께 따져야 하는 상황이다.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용 저장장치 수요가 늘고 중국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스)의 추격도 빨라지고 있어 투자를 미루기도 어렵다.
SK하이닉스는 손자회사 솔리다임의 IPO와 상장 전 투자 유치(프리 IPO) 검토 중단을 발표하면서도 "기존 생산시설만으로는 증가하는 수요 대응에 한계가 있다"며 "미국에 근거를 둔 솔리다임은 미국 내 신규 생산시설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AI 데이터센터용 eSSD(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수요 급증이 추가 생산시설 확보 필요성을 한층 뚜렷하게 한 배경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솔리다임이 전 세계 낸드(NAND) 생산능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다. 솔리다임은 생산능력을 늘리기 위해 기존 클린룸의 잔여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IPO를 통한 외부 자본 조달 경로가 막히면서 솔리다임은 증설 재원을 다른 방식으로 확보해야 한다. 신규 반도체 생산시설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SK하이닉스가 최근 충북 청주에 건설하기로 한 낸드 생산시설 M17의 경우 투자액만 19조1000억원에 이른다.
SK하이닉스는 상반기 말 기준 약 88조원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보유 자금은 많지만 HBM(고대역폭메모리)과 D램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도 진행 중이다. 청주 M15X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첨단 패키징,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등 중장기 투자 과제도 겹쳐 있다. 솔리다임의 생산능력 확충까지 고려하면 보유 현금을 어느 사업에 우선 배분할지가 중요해진다.
또 현금이 충분하다고 해서 모든 투자를 자체 자금으로 집행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은 아니다. 솔리다임에 투입하는 자금만큼 다른 사업의 연구개발·시설투자나 주주환원에 활용할 여력이 줄어들 수 있어서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도 대안이지만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낮아진다는 점에서 IPO 검토 당시 제기된 주주가치 훼손 논란이 재현될 수 있다. 금융기관 차입이나 회사채 발행은 보유 현금의 소진을 줄일 수 있지만 이자 지급과 원금 상환 부담이 따른다.
전략적 투자자 유치나 생산시설 합작투자도 방식도 있다. 다만 수익 배분과 경영 참여, 공급 조건 등을 협의해야 한다. 2022년 인텔이 브룩필드와 미국 애리조나주 공장 2곳에 최대 300억달러를 공동 투자한 사례가 있다. 비용은 인텔이 51%, 브룩필드가 49% 부담하되 인텔이 운영권을 가지는 구조다.
어느 방식이 IPO보다 유리한지는 실제 조달 조건을 비교해야 판단할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의 생산능력 확충과 경쟁력 강화는 중요한 과제"라며 "투자 시기와 규모, 재원조달 방식 등을 검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中 YMTC 추격 중, 투자 시점 중요...인텔·소프트뱅크, 인수 자회사 상장

재원 확보 시점도 중요하다. 공장 건설부터 양산까지 시간이 걸리는 만큼 자금 조달이 늦어지면 향후 공급능력 확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조달 비용뿐 아니라 투자 지연으로 놓칠 사업 기회까지 고려해야 한다.
특히 중국 YMTC가 빠르게 추격 중이다. 옴디아는 솔리다임을 포함한 SK하이닉스의 연간 낸드 웨이퍼 생산량은 올해 279만장에서 내년 286만5000장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기간 YMTC는 201만장에서 249만6000장으로 증가한다. 전망대로라면 두 회사의 생산량 격차는 78만장에서 36만9000장으로 절반 이상 줄어든다.
솔리다임만 놓고 보면 웨이퍼 생산량은 2024년 93만장에서 올해 99만장으로 증가 폭이 제한적이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YMTC는 올해 2분기 낸드 출하량 기준 약 17%의 점유율로 마이크론을 앞서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어 세계 3위에 올랐다.
솔리다임은 모회사 내부 사업을 분할해 설립한 '쪼개기' 기업과 출발점이 다르다. SK하이닉스가 2020년 약 90억달러를 투자해 인수를 결정한 인텔의 낸드·스토리지 사업을 기반으로 출범했다. 해외 인수기업도 상장 과정에서 지분 희석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사업의 형성 과정과 자금 조달 조건을 살펴 경제적 효과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외부에서 사들인 사업을 성장시킨 뒤 일부 지분을 시장에 공개하는 것은 글로벌 기업들이 활용해 온 자금 조달·투자 회수 방식이다. 인텔은 2017년 약 153억달러에 인수한 이스라엘 자율주행 기술기업 모빌아이를 2022년 나스닥에 다시 상장했다. 소프트뱅크그룹도 2016년 인수한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 Arm을 2023년 나스닥에 상장했다. 구주매출을 통해 약 49억달러를 확보하면서도 지분 약 90.6%를 유지했다.
정치권은 기존 주주의 이익이 줄어들 수 있다며 솔리다임 상장 재검토를 요구했다. 하지만 공개된 논의는 중복상장과 이익 배분 문제에 집중됐고, 상장 중단 이후 필요한 자금을 어떤 조건으로 마련할지에 대한 대안 제시는 부족했다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향후 투자를 차질 없이 이어 나가려면 낸드 증설 시기와 차입 비율을 정밀하게 조율해야 한다"며 "자체 현금 창출력과 외부 차입을 적절히 섞는 치밀한 자금 운용 셈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