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난 CEO. 또 하나의 '샐러리맨 신화'가 무너졌다고들 한다. 앞선 무너진 몇 그룹사의 오너들과 함께 묶는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르다.
엉뚱한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그룹 총수를 흉내 내지 않았다. 기업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사재를 챙기는 부도덕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직원 800명을 무급휴직(사실상 구조조정) 시키면서 본인 스스로 용퇴했다.
가장 중요한 건 어쨌거나 '실패한 CEO'의 모습임에도 그의 재기를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이제는 팬택을 떠나 자연인이 된 박병엽 전 부회장의 얘기다.
박 전부회장은 '열심히 팔아서 매출을 올려보자'는 각오만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고 판단했다. 노키아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는 것을 지켜보며 결단을 내릴 시기가 왔음을 깨달았다.
팬택 경영진에게 "현재 수준에 맞게 몸집을 줄이지 않으면 더 큰 위기가 온다"며 결단을 촉구했다. 선뜻 동의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안 된다고 반대하는 이도 없었다.
CEO직 사퇴 발표 그리고 6개월 무급휴직자 800명 명단 통보. 모두 아팠으나 드러내놓고 항거하지 않았다. '3박4일.' 박 전부회장은 새 CEO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을 신속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떠났다. 박 전부회장이 남긴 말은 "인생은 늘 승리하지 않는다. 모든 전투에서 이기지는 못한다"였다.
#남은 CEO. 결단의 순간까진 박 전부회장의 어깨가 산처럼 무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결단을 내린 후 그 무게는 다른 사람의 몫이 됐다.
월 25만대 수준이던 스마트폰 판매량은 15만대 수준으로 줄었다. 판매량을 20만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단기과제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4월 돌아오는 800명을 대신해 다른 직원들이 무급휴직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이번엔 대신할 사람이 없다. '풍전등화' 팬택의 새 수장 이준우 대표가 처한 현실이다.
이 대표는 강원 홍천 출신이다. '소를 키우며' 공업고등학교에서 공부하던 시골 청년은 성적이 오르자 돈 버는 계획을 잠시 미루고 학업을 택했다. 서울대와 포항공대를 거쳐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팬택과 인연은 입사한 현대전자산업이 팬택에 인수되면서다. 팬택 설립 초동 주체는 아니나 회사가 무선호출에서 휴대폰분야로 사업을 확대하며 도약하는 시작점에 있었다. 이미 휴대폰 개발로 명성을 떨친 연구원은 팬택의 두뇌를 책임지는 위치까지 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박 전부회장과 같은 샐러리맨 출신 CEO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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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CEO의 리더십이나 영업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팬택이 겪는 지금의 시련은 가혹하다. 하지만 블랙베리도 노키아도 모두 나가떨어지니 어찌보며 팬택만 억울한 일도 아니다. 삼성전자와 애플 '브랜드' 외에는 팔리지 않는 스마트폰시장. 더욱 마케팅비용을 연간 13조원씩 쓰는 대기업과 경쟁에서 아직 버티는 팬택이 오히려 신기한 일일 수 있다.
문득 1, 2등만 존재하고 나머지 기업이 모두 사라진 시장에서 어떤 혁신이 일어날까 생각해본다. 선호하는 제품을 사는 소비성향을 탓할 수 있겠냐만 삼성과 애플만이 남은 시장에서 소비자의 권리와 선택권은 보호받을 수 있을까.
오는 5일은 스티브 잡스 사망 2주기다. 2년 전 그날은 하필이면 팬택 신제품 발표 날이었다. '잡스의 죽음을 애도'한 팬택 CEO는 2년 후, 새 제품 발표를 책임지지 못한다. 새 CEO가 오는 10일 팬택의 신제품 출시석상에 나설 것이다.
떠난 CEO는 말이 필요없지만 남은 CEO는 지금부터다. '잘 만들어 악착같이 파는' 길 외에 없다지만 이 대표의 어깨가 너무 무거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