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투 초대석]유학 포기하고 국내 바이오벤처 1호 창업

박한오바이오니아(10,980원 ▼350 -3.09%)사장(51·사진)은 1992년 번민하는 과학도였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상태였다. 대학원 때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DNA합성 기술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 MIT로 박사후(포스트 닥터) 과정을 가기로 돼 있었다. 당시 화학분야 인재가 귀했던 탓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면 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MIT행을 포기했다. 그를 국내에 눌러 앉도록 한 건 '조국'이었다. 박 사장은 80학번이다. 군사정권이 들어섰고 대학캠퍼스는 민주화운동으로 열병을 앓던 때다. 박 사장은 자신의 대학시절에 대해 "과학자를 지망했지만 진지하게 사회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라고 말했다. 대학시절 역사를 연구하는 '언더서클'에 몸담기도 했다.
"1980년대에 학생운동을 하다 고난을 겪은 친구들을 위해 우리 사회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학을 포기하고 연구를 할 때 꼭 필요한 유전자 진단시약이라든지 장비들이 모두 수입되는 것을 국산화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당시 국내 생명공학 분야의 연구 환경은 열악했다. 어떤 연구용시약은 1개 값이 한 달 월급만큼이나 비쌌다. 또 유전자재조합 물질의 경우 미국에 주문하면 손에 쥐는데 까지 1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는 퇴직금을 다 털어 넣고 아내 도움(?)까지 받아 8000만원을 모아 1992년 그해 국내 1호 바이오벤처를 만들었다. 부친이 사업한 것이 동기가 됐다고 했다. 그러나 금전적으로 부친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배수의 진을 쳐야한다는 생각에 아예 연구소에서 보따리를 쌌다.
그는 컨테이너박스에서 회사를 시작했다. 난로를 켜놓고 DNA합성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그마나 창업 전부터 준비를 잘 했던 것이 재산이었다. 유전자연구가 활발해 질것으로 내다보고 합성한 DNA나 유전자 증폭하는 효소를 대학교 실험실이나 생명공학관련 연구소에 납품했다. 사업이 그런대로 굴러가며 6개월 만에 흑자가 났다.
기술력이 오르며 외국제품을 빠르게 따라잡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유전자 원료물질을 개발을 시작하고 21년이 지난 지금 10만개가 넘는 유전자 원료물질 중 95%가 국산화 됐다. 그는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을 했고, 유전자 기술독립을 하는데 힘을 보탠 것이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의숙(松下 政經義塾) 같이 기업이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해볼 계획"이다.
◇약력 △1962년 강원 인제 출생 △우신고, 서울대 화학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박사 졸업 △생명공학연구소 연구원 △ 1992년 바이오니아 창업 △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현재)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평가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