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SF영화 '인터스텔라'가 9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이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기상이변으로 인해 황폐해져 가는 지구를 대체할 새 행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토성에 발견된 웜홀을 통해 다른 은하계로 탐사에 나서죠.

영화의 초반부에서 우주탐사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수학과 물리학 이론이 배경에 깔린 세계관을 관객들은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멋진 우주 배경과 OST, 눈물 겨운 부성애에 감동하면서 영화관을 나설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물리학 배경지식이 필요한 데다, 런닝타임도 3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가 국내에서 이렇게나 크게 히트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이 영화에서 특히 관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근거한 '시간지연' 현상입니다. 영화는 시간지연 현상을 소재로 활용해 아버지와 딸의 감동적인 재회로 관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지연 현상을 소재로 이토록 감명을 준 작품, 또 없을까요?
"알고 보니 지구였다"…충격적인 클리셰의 원조 '혹성탈출'
'시간지연'을 반전의 장치로 이용해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작품은 여러 편 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영화 '혹성탈출'입니다. 원작 소설을 1968년 찰턴 헤스턴 주연으로 영화화한 이 작품은 팀 버튼 감독에 의해 2001년에 다시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요.
지구를 떠난 주인공 일행이 오랜 우주여행 끝에 한 행성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원숭이가 문명을 이뤄 지배하고 있는 행성이었죠. 하지만 알고 보니 자신들이 떠난 지구의 수천 년 이후 모습이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결말은 많은 SF 작품에 오마주 되기도 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이 활발하게 제작된 이웃 일본에서도 시간지연 현상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구성한 작품들이 마니아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는데요. 이 글을 통해 소개할 '별의 목소리'와 '톱을 노려라'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초속 5cm', '언어의 정원'과 같은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열렬한 팬을 보유하고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별의 목소리'입니다. 여주인공과 배경 음악을 제외하고 모두 감독이 혼자서 직접 만들어낸 25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입니다.
우주와 지상으로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 '별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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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2일에 공개된 '별의 목소리'는 외계 문명과의 전투에 파일럿으로 참전한 여주인공과 지구에 남아있는 남자 동급생이 머나먼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누는 사랑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주인공은 지구에서 8.6광년 떨어진 시리우스 성계까지 가서 인류의 운명을 건 전투를 벌이죠.

평범한 중3 여학생이었던 나가미네 미카코는 뜬금없이 외계문명 타르시안에 대항할 국제연합군의 로봇 파일럿에 선발됩니다. 그리고 우주로 나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요.
중학교 시절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동급생 테라오 노보루와 메일을 주고 받는데 이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서로 통신이 교환되는 시간도 길어집니다. 특히 적의 기습으로 인해 긴급 워프한 시리우스 성계에서 그녀가 보내는 메일의 도착 예상 시간은 무려 8년하고도 224일입니다.

15세의 나이 그대로 우주에서 외계 생명체와 싸워나가는 미카코와 이후 9년의 세월이 걸려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우주군에 입대한 24살의 노보루. 우주와 지상으로 헤어지게 된 연인들의 감동적인 스토리는 일본에서 그 해 최고의 SF작품에게 수여하는 '성운상'을 포함한 다수의 상을 석권했습니다. 이후 발매된 DVD 역시 1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개인 제작 작품으로는 기록적인 성과를 보였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노력과 근성으로 만든 만화 '톱을 노려라!'
시간지연 현상을 반영한 애니메이션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 1988년 제작된 '톱을 노려라!'입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대성공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제작사와 감독의 반열에 오른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의 초기작입니다. OVA 총 6편으로 제작됐습니다. 이후 가이낙스 창립 20주년 기념으로 2004년에 후속편인 '톱을 노려라 2!'가 역시 6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가이낙스는 데뷔작인 '왕립우주군'의 흥행 참패로 해체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때 쌓인 빚을 갚기 위해 오타쿠들이 좋아할 만한 설정을 꽉 채워서 작품을 만듭니다. 그것이 '톱을 노려라!'입니다.
제목부터 70년대 대표 순정만화 중 하나인 '에이스를 노려라!'를 따라 했습니다. 수많은 만화, 특촬물, SF소설 등의 패러디가 담긴 데다 초대형 슈퍼로봇을 조종하는 여주인공들의 서비스 신까지…그야말로 오타쿠 문화의 모든 것을 반영해 만든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타카야 노리코는 우주 괴수와의 전투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 파일럿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결국 동경하던 선배이자 에이스 파일럿인 아마노 카즈미와 함께 궁극의 슈퍼로봇 건버스터에 탑승해 우주 괴수를 섬멸합니다. 이 전투로 인해 건버스터가 어마어마하게 가속하면서 발생한 시간지연 현상으로 1만2000년 후의 지구로 귀환한다는 것이 '톱을 노려라!' 의 내용입니다.
이 작품에서 시간지연 현상은 스토리텔링의 핵심에 있습니다. 노리코는 그대로인데 고등학교 단짝 친구는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어느새 노리코의 나이에 이릅니다. 최종 전투를 앞둔 시점에 그 친구에게서 "내 생전에는 두 번 다시 못 만날 것 같으니 딸이 살아있을 때라도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편지를 받고 주인공 노리코는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감동의 마지막 장면은 '시간지연' 설정을 활용해 만들어진 스토리텔링의 정수로 이 작품을 최고로 끌어올렸습니다. 1편과 2편의 연결고리로서 팬들의 갈채를 받습니다.
'설정놀이'와 현란한 구성을 좋아하는 가이낙스와 안노 감독의 작풍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6화에서 보여준 흑백 연출과 스틸 컷, 원화 구성은 이후 에반게리온 TV 판을 비롯해 '가이낙스'다운 구성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합니다.

우주 탐험을 배경으로 한 SF작품에서 '시간지연' 현상은 어떻게 보면 처치 불가능한 난제였습니다. 물리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초광속'은 제쳐두고 빛에 속도에 거의 근접한'아광속'여행을 통해 먼 우주로 나간 주인공 일행들은 '상대성 이론' 때문에 다시는 고향에서 출발했던 시간대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을 무시하고 그냥 동네 마실 다녀온 듯 작품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스텔라'를 비롯해 소개해드린 애니메이션 작품에서는 물리학의 테두리 내에서 시간지연을 핵심 스토리의 한 축으로 삼아 관객에게 감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과학 이론을 무시하는 대신 이를 잘 활용해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이 SF영화가 줄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재미가 아닐까요?
☞ 본 기사는 딱TV (www.ddaktv.com) 에 12월 8일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