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은행들의 핵심 과제는 생산적금융이다. KB,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금융까지 5대 금융그룹이 발표한 생산적금융 규모만 500조원이 넘는다. 앞으로 5년간 각 금융그룹이 비슷한 산업에 투자, 보증, 대출로 이 금액을 투입한다.
정부가 깃발을 들고 이끌고 있지만 생산적금융은 우리 금융산업이 가야할 길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 상업은행들의 순이자마진(NIM)이 한국 은행들에 비해 배 이상 높은 것은 관치로 대출금리를 눌러서가 아니다. 그들은 높은 리스크를 감당하고 그에 상응하는 돈값(이자)을 받기 때문이다. 반면 그런 리스크를 선별하고 감당할 능력이 부족한 우리 은행들은 안전한 담보 위주의 영업에 치중했고 국내 은행산업은 '저위험-저수익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마진이 작으니 양을 늘려 성장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엄청난 가계부채이기도 하다.
금융그룹 회장들을 만나 보면 모두 생산적금융에 진심이다. 새 정부의 핵심정책이서가 아니라 한국 금융이 더이상 부동산, 가계대출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길로 가야 한다는 당위와 준비가 돼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은행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어디까지가 생산적금융인지 부터 혼란스러워한다. 금융권에선 최근 국민성장펀드의 삼성전자 지원에 대해 뒷말들이 많다. 국민성장펀드와 5대 시중은행들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P5)에 2조5000억원을 저리에 대출키로 했다. 국민성장펀드가 2조원을 국고채 수준 금리로, 5대 은행이 5000억원을 3%대 금리로 빌려준다.
비슷한 시기 삼성전자가 넘치는 현금 때문에 채권투자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투자 대상엔 은행채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돈에 꼬리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삼성전자 입장에선 은행에서 국고채 수준으로 돈을 빌려 금리가 더 높은 은행채에 투자하는 결과가 된다. 삼성전자는 대신 협력사들을 위한 2000억원의 특례보증프로그램을 신설키로 했지만 삼성전자가 협력사 지원할 2000억원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삼성전자 대출은 은행들에게 모두 역마진이다. 삼성에게도 이 대출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에는 A기업에 어떤 용도로 얼마를 대출하려고 하는데 생산적금융의 실적으로 인정되느냐, 신규대출만 되고 만기연장은 생산적금융이 아니냐 같은 문의(또는 건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현장에선 어디까지가 생산적금융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의미이고, 당장 실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당국이 은행들의 생산적금융 경쟁을 시키고 있다"고 토로했다. "산업은행도 생산적금융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산은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부터 하려고 한다"는 불만도 들린다. "반도체, AI 등에 투자하는게 국내 소비 확대로 이어질지 의문"이라는 지적은 생산적금융 담당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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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500조원을 투입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목표를 달성하려면 투자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대상을 골라낼 능력도 필요하다. 금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성공적인 생산적금융은 단순히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할 만한 위험인지 선별하는 역량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은 이제서야 전문심사역을 채용하고 산업 현장에 보내 연수시키고 있다.
위험가중치 조정 등 생산적금융을 위한 제도 정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은행들에게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길로 가라고 요구하려면 관련 제도 역시 혁신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올해는 생산적금융의 원년이다. 이제 시작이라는 얘기다. 빨리 실적을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 500조원을 이 정부 임기 내에 다 집행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산적금융을 망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