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10개월 앞둔 국립농업과학원 홍승범 연구관의 KACC 이야기
-15년전 벼키다리병균이 밝혀낸 '진화'…"보존해야 변화도 읽는다"

"이제 퇴직까지 딱 10개월 남았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물부 홍승범 농업연구관이 최근 자신의 글을 시작하며 적은 첫 문장이다.
'곰팡이 박사'를 줄인 '곰박'을 필명으로 써온 그는 지난 32년 동안 농업미생물은행(KACC)과 함께했다. 이름조차 낯선 곰팡이를 들여다보고, 분류하고,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그의 연구 인생이었다.
그런 그가 연구 인생의 끝자락에서 꺼내든 이야기는 의외로 '다윈의 진화론'이었다.
평생 곰팡이를 바라본 그에게 다윈은 160여 년 전의 생물학자가 아니었다. 논과 밭, 그리고 미생물은행의 작은 보존용기 속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이어가는 '살아있는 유산'이었다.

홍 연구관은 '벼키다리병균(Fusarium fujikuroi)'을 예로 들었다.
벼키다리병에 걸린 벼는 이름 그대로 비정상적으로 키만 웃자란다. 일본에서는 '바보 모'를 뜻하는 '바카나에(馬鹿苗)'병이라고 부른다. 병원균이 식물 생장호르몬인 지베렐린을 만들어 벼를 지나치게 자라게 한 뒤 결국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은 곰팡이가 지난 15년새 크게 달라졌다.
충북대 김흥태 교수 연구팀은 최근 2006~2008년 채집한 벼키다리병균과 2020~2021년 채집한 균주를 비교했다. 오래된 균주는 KACC가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분석 결과 과거 균주 23개 가운데 지베렐린을 만드는 G그룹은 9개였지만 최근 균주에서는 24개중 22개로 늘었다. 벼키다리병 방제에 사용되는 프로클로라즈에 대한 반응도 달라졌다. 최근 균주가 과거 균주보다 훨씬 강한 저항성을 보였다.

홍 연구관은 이를 다윈이 설명한 '자연선택'으로 바라봤다. 농약에 약한 곰팡이는 사라지고 우연히 저항성을 가진 곰팡이가 살아남은 결과라고 했다. 살아남은 개체가 다시 후대를 만들면서 저항성을 지닌 병원균의 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변이가 생기고, 환경에 유리한 개체가 살아남고, 그 형질이 후대로 이어진다. 19세기 찰스 다윈이 설명했던 자연선택이 21세기 한국의 논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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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가 홍 연구관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따로 있다. 15년 전의 곰팡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논에서 병원균을 채집하면 지금의 특성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균이 과거와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는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왔는지를 밝히려면 '과거의 생명'이 필요하다.
2006년 채집한 벼키다리병균 23개를 KACC가 보관하지 않았다면 이번 비교 연구도 어려웠다. 국립농업과학원 농업미생물은행은 바로 그런 '과거의 생명'을 보존하는 곳이다.
논과 밭, 작물과 토양에서 찾아낸 세균과 곰팡이, 효모 등 다양한 미생물을 수집하고 분류해 장기간 보존한다. 지금은 쓰임을 알 수 없는 작은 균주 하나지만 수십 년 뒤 식물병의 원인을 밝히거나 새로운 농업소재를 만드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KACC는 단순한 미생물 저장고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을 모아 농업의 시간을 저장하는 '미생물 씨앗은행'이자 한 시대의 농업을 남겨두는 '생명 기록관'에 가깝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KACC 설립 초창기에는 "논밭에 나가면 얼마든지 병원균을 구할 수 있는데 왜 돈을 들여 보관하느냐"는 시선도 있었다고 한다. "오래 보관하면 병원성이 떨어져 연구 가치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뒤따랐다.
미생물은행은 액체질소와 동결건조 등의 방법으로 균주를 장기간 보존한다. KACC에는 1990년대 초 수집된 고추 탄저병원균도 남아 있다. 35년이 넘은 지금까지 연구 소재가 될 수 있는 '과거의 생명'이다.
오래전 보존한 균주는 새로운 병해가 나타났을 때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기준이 된다. 어떤 병이 발생했고 어떤 병원균이 존재했는지, 그 병원균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변했는지를 훗날 다시 꺼내볼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농업은 끊임없이 병원균과 싸운다. 새로운 농약을 개발하면 병원균은 다시 살아남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사람과 미생물이 벌이는 끝없는 '적응과 대응'의 역사다.

홍 연구관이 퇴직을 앞두고 32년간 몸담아온 KACC의 기록을 남기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글에 이렇게 적었다.
"훗날 외부의 바람으로 KACC가 흔들릴 때 지금 남기는 기록이 작은 바람막이가 되기를 바란다."
32년간 곰팡이를 기록해 온 한 연구자와 30년 넘게 미생물을 지켜온 KACC의 시간은 그렇게 포개진다. 한 사람은 사라질 수 있는 생명을 기록했고, 한 기관은 그 기록을 다음 세대로 이어왔다.
'곰박'이 하고 싶은 말도 어쩌면 단순하다. 오늘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곰팡이 하나가 수십 년 뒤 우리 농업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설명하는 귀중한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윈의 진화론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논에서, 곰팡이에서, 그리고 KACC의 작은 보존용기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