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은행 사칭 가짜 이메일에 속지 않은 건
진위 확인할 시스템과 수단에 익숙한 덕분
고령자 대상 금융사기 퇴치할 인프라 시급
얼마 전 모르는 외국인으로부터 영문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호주 소재 은행의 인사담당자라고 밝히면서, 해외 자산운용사가 한국에 자산운용사 설립을 검토 중이니 관심 있으면 메일에 적힌 주소로 "급하게" 연락을 달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비즈니스 네트워크 사이트인 링크드인(LinkedIn)을 통해 내 연락처를 파악했나 추측하면서도, 호주 은행의 모르는 인사담당자가 직접 연락해 왔다는 사실이 왠지 석연치 않았다. 그래서 평소 자주 사용하는 인공지능(AI) 서비스 몇 곳에 진위 검증을 의뢰했다. 그 결과, 해당 은행은 실재하지만 인사담당자의 계정이 정교하게 도용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산업은행 30년 경력의 나조차 순간적으로 헷갈릴 만큼 인터넷 사기 수법이 정교해지고 있다. 이처럼 그럴듯한 접근이 일상화한다면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거나 인지기능이 저하된 이들은 어떻게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최근 국내 여러 금융회사에서 정보유출 사고가 잇따랐다. 핵심 금융망보다는 직원과 대출모집인 등이 이용하는 외부 업무시스템이 취약한 유출 고리로 지목됐다. 계좌 비밀번호 같은 핵심 정보가 유출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름과 연락처만으로도 사칭 범죄의 소재가 될 수 있다. AI가 자연스러운 문장과 목소리까지 만들어 내는 시대이기에 더욱 그렇다.
피해 규모는 이미 작지 않다. 경찰청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2024년 8545억원으로 전년보다 거의 두 배(91%)로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1조원을 넘어섰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2023년 65세 이상 노년층 치매 환자의 보유 자산을 약 154조원으로 추산했다. 2050년에는 488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물론 고령자나 치매환자라고 모두 금융 판단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이용할 만한 제도 수단이 친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금융회사가 사전 방어에 더 책임을 져야 한다. 외주업체와 영업지원시스템까지 보안 점검 범위를 넓히고, 이상 접근 조짐을 조기에 발견해 고객에게 신속히 알려야 한다. 고객의 평소 거래와 다른 거액 송금이나 새로운 수취인에 대한 반복 이체 때는 추가 확인 절차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고객이 미리 동의했다면 가족 등 지정된 연락인에게 이상 거래를 알리는 방식도 검토할 만하다. 다만 나이 만으로 거래를 제한하거나 가족에게 재산 통제권을 넘겨서는 안 된다. 본인의 의사와 사생활을 존중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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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능력이 저하되기 전에 재산관리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일도 중요하다. 현행 임의후견과 신탁 제도는 절차가 복잡하고 접근성이 낮다. 올해 시작된 치매공공신탁은 의미 있는 출발이다. 생활비와 의료비는 안정적으로 지급하고 고액 자산의 처분은 별도로 점검하는 방식이 널리 활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공공기관과 금융회사의 안내가 쉬워져야 한다.
정부도 금융당국과 복지기관·경찰의 대응을 연결해야 한다. 개인정보 유출을 통지받은 고객이 어디에 문의하고 어떤 보호조치를 신청할 수 있는지 한 번에 안내받도록 해야 한다.
국민 교육은 범죄 수법을 나열하는 데서 실제 행동을 익히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돈을 보내라는 요청이 오면 통화를 끊고 원래 알고 있던 번호로 다시 확인한다. 문자 속 링크로 접속하지 않는다. 혼자 판단하기 어려우면 금융회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묻는다. 이런 단순한 습관을 은행·주민센터·복지관에서 반복 훈련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를 탓하지 말고 신속히 신고하도록 돕는 분위기도 중요하다.
내가 의심스러운 이메일에 답하지 않은 것은 특별한 식견이 있어서가 아니다. 확인해 볼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의 발전은 거래 속도가 빨라지는 일 뿐 아니라 누구든 안심하고 자기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지 여부로 평가받아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 물어볼 곳과 잠시 멈출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 초고령사회가 준비해야 할 금융안전망의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