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

선진국이 돼서일까. 십수년전만 해도 유가가 오르면 가장 먼저 나왔던 '에너지를 아끼자'는 구호는, 유가는 물론 각종 에너지 가격이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데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는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뒤따라 필요없는 난방을 줄이고 조명을 끄고 고연비운전을 습관화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자고 호소했다. 이런 방식의 전사회적 캠페인은 이제 유물이 된 듯 하다.
우리가 늘 반면교사 삼아 온 유럽의 분위기는 그런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인적 에너지비용에 시민들이 먼저 난방을 끄고 에너지소비를 줄이자고 외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LNG(액화천연가스)나 난방유 수급이 이미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여기에 내년 2월로 예정된 EU의 러시아 석유제품 수출 제재가 현실화할 경우에 대해 온 유럽이 절박한 준비에 들어갔다.
에너지 부족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높은 에너지 비용 문제는 우리도 직면한 두 개의 큰 리스크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언제나 삶이 팍팍한 서민들, 특히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정부가 하고 있다는 에너지수급점검 회의보다 피부에 와닿는 대책이 필요하다. 게다가 높은 에너지 비용은 고질적인 무역수지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이다.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으면 줄여야 한다.
정유업계에서부터 업계와 정부가 공동으로 전국민 에너지 절약 확산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적게 쓰면 자기들이 돈을 덜 벌게 되는데도 그렇다. 한 정유사 임원은 "에너지 절약 캠페인은 정유사엔 좋을게 없지만 앞으로 더 나쁜 상황이 올 수 있음을 감안하면 이제는 그런 방법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에너지절약 구호가 완전히 사라진건 아니다. 에너지 담당부처 장관은 요새 절약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런데 범정부 차원에서 밀어붙이지를 못한다. 왜일까. 다른 정유사 임원은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로 되돌아가자고 말하는 듯 해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이전 정부들을 거치며 더 쉬운 방법도 개발해뒀다. 바로 유류세 조정이다.
세금을 깎아주면 교통·난방비를 부담스러워하는 여론은 당장은 잠재울 수 있다. 코로나19(COVID-19) 극복 과정에서 실시한 유류세 한시 인하도 마찬가지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돕는다는 명분도 있었다. 그런데 유류세 인하는 감세일까. 얼핏 감세같지만 정부 재정에 순감은 없다. 유류세를 내린만큼 어디선가 증세가 이뤄진다. 그래도 안되면 나랏빚이 늘어난다. 알고보면 모두 국민들에게 부담이다.
선진국 격도 지키고 '이지경이 되도록 뭘 했냐'는 말도 듣지 않으려면 가만있으면 될 테지만, 행정엔 위기를 위기라고 알리고 고통을 분담하자고 제안할 용기도 필요하다. 아껴야 할 때 아끼자고 못하면 아낄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진다. 정치는 진영논리로 갈라져 가고 있지만 민생엔 진영이 없다. 전국민이 힘을 모으자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위기를 정확히 진단했다는 평가가 정부의 몫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