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반도체왕국' 일본의 역습]①파격적 보조금+혜택 앞세운 일본

2023년은 '일본 반도체 부활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 기술 패권을 놓고 격화하는 미중 분쟁 속에서 일본 정부는 막대한 반도체 지원금을 글로벌 기업들에게 약속하며 옛 반도체 왕국의 꺼졌던 불씨를 되살리려 한다.
일본 정부는 10년 이상 자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조건으로 기업 설비투자의 최대 3분의1을 지원하고, 반도체 장비와 소재는 '최대 50%'를 보조한다는 파격적 혜택을 내걸었다. 이는 국적과 첨단·범용 반도체에 상관없이 지원된다. 일본 내부에서조차 '도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판을 뒤집기 위한 빠르고 공격적인 행보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를 국가사업으로 지정하고 해외 기업 유치와 자국 기업 육성을 동시에 추진 중이다. 반도체 부흥을 위해 일본 기업들 간 연합체 '라피더스'를 만들었고, 또 자국 내 반도체 생산기반 강화를 위해 대만 TSMC, 일본 덴소, 소니 반도체 솔루션과 합작사 JASM(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을 설립했다.
해외기업 유치를 위해선 보조금 카드를 꺼내들었다. 또 자국 내 공장에서 만든 반도체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일본판 인플레이션감축법'도 시행할 예정이다.

일본 측의 각종 보조금 및 지원 제도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화답했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은 현재 12~28나노 파운드리 생산시설인 1공장을 구마모토현에 건설 중이다. TSMC는 6나노 2공장에 이어 3나노 3공장까지 일본 현지에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 마이크론은 히로시마현에 2024년 말 양산을 목표로 10나노 D램 공장을 건설 중이다. 실제로 미국 마이크론의 일본 히로시마 D램 공장과 대만 TSMC 구마모토 1공장은 설비 투자액의 약 40% 가량을 일본의 보조금으로 조달한 것으로 파악된다.
삼성전자도 일본 요코하마시에 400억엔(약 3600억원) 규모의 첨단 반도체 연구 개발 거점을 신설할 계획이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삼성전자 투자액의 절반인 200억엔(1800억원)을 보조한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입지는 미미하다. 시장조사업체 IC 인사이츠가 집계한 2021년 기준 전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 순위 1위는 삼성전자로, 2위와 3위는 인텔, TSMC다. 4위와 5위는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다. 10위권 내에 일본 기업은 없다. 15위권 내로 범위를 넓혀도 일본 기업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키옥시아 한 곳 뿐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글로벌 반도체 '톱 10' 기업 중 6곳은 일본 기업이었다. 1991년 기준 매출 순위를 살펴보면, △2위(NEC) △3위(도시바) △5위(히타치) △8위(미쓰비시) △9위(후지쓰) △10위(마쓰시타) 등 일본 기업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7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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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산업성이 2021년 3월 발표한 '반도체·디지털산업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1988년 기준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0.3%에 달했다. 당시 미국의 점유율은 36.8%로 일본이 확실한 우위를 보였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는 3.3%에 불과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기술에 대응하지 못한 일본의 점유율은 1990년대 이후 내리막을 탔고, 2019년 10.0%로 떨어졌다. 일본 정부는 이같은 상태가 지속될 경우 2030년에는 일본의 점유율이 0%에 가깝게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일본 반도체는 과연 옛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 강점이 있고, 특히 실리콘 웨이퍼와 포토레지스트(감광재)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반도체 전공정 소재 중 가장 비중이 높은 실리콘 웨이퍼 시장에서 일본의 시장점유율은 50% 이상이며,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또 CMOS 이미지센서 시장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소니를 비롯, 도쿄 일렉트론, 스크린 홀딩스 등 반도체 장비 분야의 강자들이 있다. 막대한 보조금과 우호적 제도를 앞세운 정부의 강력한 지원 속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변화에 대한 저항, 그리고 정부의 무리한 개입 및 보호주의 등 일본 반도체 왕국의 쇠망을 초래한 요인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돈잔치'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