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
"기업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공시 시점을 고정하지 않는 겁니다. 경제단체가 기업들의 사정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늦추는 게 좋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지속가능성 평가 분야에서 십 수년 일한 한 전문가는 한국의 지속가능성 공시 시점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을 답답해 했다. 그는 "언제 시작된다는 게 명시가 돼야 예산 계획을 세워 준비를 한다"며 "(공시 의무화) 1차 대상이 자산규모 2조원 이상 대기업이지 중소기업이 아닌데, 마냥 연기하는 게 실제 대기업들의 필요를 반영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유사한 이야기는 기업 실무진들로부터도 들을 수 있다. A 대기업의 ESG 부문 책임자는 "2027년이든 2028년이든 타임라인이 정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며 "언제부터 할 지 정하는 게 기업에도 유리하다"고 했다. B 대기업의 ESG 실무자는 "지난해 공시 시점이 연기된 뒤 경영진의 위기의식이 약화됐다"며 "업무를 추진하기 위한 동력이 크게 떨어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IFRS(국제회계기준) 재단이 설립한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에 기반한 한국형 공시제도를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2025년부터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도입 시점을 '2026년 이후'로 변경했다. 실무적인 이유로 어느 정도 연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시점을 특정하지 않은 데 대해 기업들은 부정적 의견을 갖고 있다. 기존 시점을 기준으로 준비하던 기업들은 비용 면에서 손실을 입기도 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기후공시나 탄소배출 저감이 '어차피 가야 할 방향'이란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EU(유럽연합)에 법인을 둔 한국 대기업 대다수는 2025년 회계연도부터 적용되는 ESRS(유럽 지속가능성 보고기준) 기반 의무공시 대비에 한창이다. 미국 내 소송 이슈가 있지만 미국에 상장한 한국 기업들은 SEC(증권거래위원회)의 기후공시에도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단지 공시에 국한된 게 아니다. 기업에 탄소배출 저감과 기후 위험 관리 문제는 당위의 차원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탄소배출이 주요 국가의 다양한 탄소가격제도와 공급망 내 고객사들의 요구를 통해 기업의 직간접적 비용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투자자의 요구에 응하고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제이면서, 유럽 등 일부 시장에서는 영업 허가를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분야와 관련한 정부의 정책 기조는 수세적이다. 글로벌 네트워킹을 가진 한 컨설팅 업계 관계자는 "탄소배출 저감 대응과 관련한 국제 회의에서 아직 '왜 해야 하느냐'고 묻는 곳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며 "다른 곳들은 다 '어떻게'를 얘기한다"고 했다. 비단 공시만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금융 등의 정책에서 정말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과 기업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책 입안자들은 깊이 따져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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