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여행을 간 한국인들이 한·일 문화 격차를 실감하는 곳 중 하나는 라멘집 입구에 놓인 메뉴 자판기 앞이다. 메뉴를 골라 식권을 먼저 구매해야 식사를 할 수 있다. 한국식으로 무작정 식당에 들어갔다가는 핀잔을 듣고 자판기 앞으로 되돌아오기 일쑤다. 한때 일본을 따라 한국에서도 메뉴 자판기 도입이 유행이었지만 정착되지는 못했다. 한국 정서가 '더치페이(각자내기)'보다는 '한턱내기'에 익숙한 탓이다.
일본 식당 자판기는 내가 먹을 것만 골라 결제하기에 좋다. 상대방이 누구든 대접받는 것을 '빚'으로 여기는 일본 문화에 제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내 것만 내면 정이 없다고 여긴다. 한 사람이 밥을 사면 다른 사람이 커피를 사고 다음에는 처음 커피를 산 사람이 밥을 사면서 만남을 이어간다.
9월 시행 예정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은 이 같은 국민정서와 동떨어져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법 집행 대상을 구체화하지도 않고 직무 관련 식사접대비 한도를 1인당 3만원으로 제한해 법 오용 가능성을 열어놨다.
예를 들어보자. 대학 동창 두 명이 경제부 기자와 은행원이 돼 취직 축하 겸 저녁을 먹었다. 1인당 2만8000원짜리 참치회와 소주 2병을 마셨고 1차 계산을 은행원이 했다. 2차는 기자가 냈고 3만원이 나왔다. 이 둘의 저녁은 법 위반일까? 결론은 '예스'다. 현 김영란법은 '직무연관성' 범주를 명확히 하지 않았고 상계(相計) 개념도 넣지 않았다. 경제부 기자와 취재원인 은행원 사이에 직무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고, 일단 1차에서 인당 3만원을 넘은만큼 처벌할 수 있다.
참치회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1인당 3만원이라는 상한선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현 물가를 고려할 때 3만원은 삼겹살 몇 인분에 소주 1병이면 끝나는 금액이다. 억울하게 처벌되지 않으려면 상대가 누구든 철저한 '더치페이'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턱낸다'는 친구 부름에 맘 편히 응하지 못할 바엔 아예 만남 자체를 삼갈 가능성이 높다.
'직무연관성'을 특정하지 못한다면 김영란법은 국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될 뿐이다. 베품에 익숙한 한국 정서와 현실물가를 외면한 법은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할 가능성이 크다. "눈 앞에 있는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헌법정신이 발휘돼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