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과 대화 사이[특파원 칼럼]

대결과 대화 사이[특파원 칼럼]

베이징(중국)=김지산 특파원
2023.06.22 04:05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설화를 되짚어보면 특이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싱 대사가 야당 대표와 만찬 직전 굳이 모두발언을 해야 했느냐다. 누가 봐도 명백한 정치적 행위다.

게다가 "중국이 지는 쪽에 베팅하면 후회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한 것도 그렇다. 중국 내 대표적 지한파인 싱하이밍 대사가 한국인들이 받아들일 감정적 반응과 정치적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이런 점에서 싱하이밍 대사 설화는 철저히 '계획된 도발'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한국이라는 연못에 돌 하나를 던졌을 때 미치는 파장을 지켜보자는 심산인데, 국장급 외교관의 독단적 행동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야가 갈라지고 정치권에서는 싱하이밍 대사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인물)'로 지정해 추방하라(신원식 국민의힘 의원)는 목소리가 나왔다. 대통령실이 '중국 측의 적절한 조치'를 요구한 지 하루 만에 윤석열 대통령은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외교관으로서 싱 대사의 '태도'를 직격했다. 주재국 최고 지도자가 일개 대사 교체를 요구한 것도 보기 드문 일이긴 마찬가지다.

중국 정부는 갈등을 키우지 않으려는 듯 대응 수위를 철저히 조절했다. 처음부터 파장의 정도를 관찰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의도를 몰랐을까. 충분히 인지하고 약간의 오버를 더해 대응했다는 게 기자의 판단이다. 미국과 찰떡 호흡, 중국을 상대로 한 대등 외교, 정권 '선명성' 부각, 반중 여론에 기반한 야당 공격까지, 주변국과 국내 정치적 이해 관계자들에게 많은 걸 보여줬다.

중국이 확인하고자 했던 건 한국이 '중국 패배'에 베팅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미국 승리'에 얼마나 많은 것을 걸었느냐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확인이 끝난 지금 다가올 미래 미·중 경쟁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그림이 그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로 미·중 관계에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왕이 정치국원, 친강 외교부장을 각각 만나 대화하면서다.

예상됐던 충돌 방지 '가드레일'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 오판 방지를 위한 고위급 대화 창구를 만들자는 데 합의한 자체를 무시할 수 없다. 무시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상당한 성과로 보는 게 맞다.

상대국의 돌발 행동에 강경 대응을 하기 전에 상대로부터 자초지종 설명을 듣자는 건데 서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명분 쌓기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합의문 같은 글보다 말이 융통성 있고 효과적이다.

우려되는 건 두 강대국 간 양해 범위가 넓어졌을 때 한국 같은 우방국의 희생을 모른 척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130여년 전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는 대신 대한제국 통치권을 일제에 넘겨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자국 전기차 산업을 키우겠다며 인플레이션 감축법 제정을 감행, 현대차를 곤경에 빠뜨렸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동맹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또는 그와 비슷한 성향의 지도자가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블링컨 장관이 중국으로 떠나기 전 박진 외교부 장관,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전화 통화를 한 것이 미·중 관계 변화 과정에 예기치 않게 한국이 피해를 보더라도 이해해달라는 사전 통보로 보여지는 건 무리한 해석일까?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도 중국으로부터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외교적 역량이 절실한 시대다. 역대 정권의 '전략적 모호성'보다 더 험난한 길일 것이다. 단순했던 미·중 대결 양상이 밀당(밀고 당기기)으로 전환되는 세상에 지금보다 더 영악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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