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애덤 스미스가 본 공감의 기술

[MT시평]애덤 스미스가 본 공감의 기술

김동규 (국제시사문예지 PADO 편집장)
2025.02.17 02:03
구글 선호 매체 등록 구글에서 머니투데이 추가하기
김동규(국제시사문예지 PADO 편집장)
김동규(국제시사문예지 PADO 편집장)

우리는 대중예술에서 감정이 격한 그대로 표출되는 것을 '신파조'라고 부르며 놀린다. 예전에 본 '당신은 내 인생의 빛'(You light up my life)라는 미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주인공이 슬픔을 꾹 누르고 관객들 앞에서 코미디를 하는데 그녀의 눈이 웃고 입이 웃고 말도 웃긴데 그녀는 울고 있다. 영화 속의 관객은 당황하고 영화를 보는 나는 눈물이 난다. 그녀가 진짜 울어버렸다면 영화는 망작이 돼버렸을 것이다. 연기자가 관객을 웃기려면 웃음을 참아야 하고 울리려면 울음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연출자, 연기자들이 잘 안다.

'국부론'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공감'의 원리를 다룬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물건을 교환하고 감정을 교환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건도 감정도 가격이 안 맞으면 교환(거래)이 이뤄지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연민을 갖는 것은 좋은 덕성이라고 오랫동안 배웠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진 마음(仁)이며 군자의 가장 중요한 덕성이라 배웠다. 하지만 이 측은지심이라는 것은 군자, 즉 엘리트가 내려보는 시선을 담고 있다. 백성('어린 백성'이라고 종종 표현했는데 '어린'은 어리석다는 뜻이다)은 불쌍하니 그들을 어버이의 측은한 마음으로 다가가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인데 동아시아적 엘리트주의다. 반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사상가 애덤 스미스는 공감의 수평성, 양방향성을 이야기한다. 고통의 당사자인 나와 옆에서 지켜보는 타인은 어차피 감정의 강도가 같을 수 없다. 나에겐 나의 치통이 100만큼의 고통이지만 타인에게는 0일 뿐이다. 물론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다정다감한 타인은 10 정도 느껴줄 수는 있다. 그런데 내가 타인도 100만큼 느껴주길 바라며 아프다고 울거나 호소한다면 다정다감한 타인조차 10의 연민은커녕 오히려 경멸감을 갖게 해 다가오는 걸 멈출 것이라는 게 애덤 스미스의 설명이다. 동아시아적 측은지심이 수직적 덕성이라면 애덤 스미스의 공감은 수평적 덕성이다. 평등한 시민들끼리 어떻게 공감대를 만들어야 할지를 양방향으로 설명한다. 냉담할 수밖에 없는 타인은 고통받는 이웃의 고통에 다가가려 노력해야 하며 반대로 고통받는 사람은 타인의 어쩔 수 없는 냉담에 다가가려 노력하면서 고통의 표현을 절제해야 한다.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이 느끼는 아픔(100)과 타인의 냉담(0)이 중간쯤(50)에서 만나도록 양쪽 모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회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상품이나 감정이나 교환하는 방법은 비슷하다. 파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격을 높게 부르고 사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격을 낮게 부르면 영원히 교환(거래)은 성사되지 않는다. 시민사회가 하나로 묶이기 위해선 양측의 가격이 맞아야 하고 측은지심과 냉담지심이 만나야 한다. '도덕감정론'은 새롭게 영국의 주인이 된 젠트리 계급에게 사회적 연대를 위한 덕성을 알려주는 일종의 자기계발서였다. 1987년 이후 이 나라의 주인이 된 한국의 젠트리 계급도 사회적 연대의 덕성을 계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