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20년 전에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포함한 유럽국가의 농림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선진국의 농정을 분석하고 우리나라 농업정책의 발전을 위한 시사점을 도출하는 목적이었는데 담당 국장에게 우리나라의 농정이슈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농업발전을 위해 현지 정부가 어떤 정책을 추진하는지를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돌아온 답변이 다소 의외였는데 정부가 딱히 먼저 나서서 정책사업을 만들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거의 없고 농가조직이 요구하는 사업이 있으면 그것을 검토해 필요하면 지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농정을 돌이켜보면 선진국의 우수한 정책을 도입해 단기간에 성과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가 많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생산자조직인 농업협동조합의 경우 1950년대 후반에 정부가 설립해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미국의 캘리포니아 및 애리조나의 감귤 생산자조직은 '썬키스트'라는 브랜드를 1907년에 만들어 세계 시장을 공략했고 유럽의 생산자조직인 PO 또한 품목별로 차이는 있으나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경우가 많다. 이처럼 농업 선진국의 생산자조직은 우리보다 오랫동안 농민의 자발적인 조직화를 통해 성장했지만 우리 농협은 정부 주도하에 짧은 기간에 외형을 완성해 농산물 생산과 유통을 담당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 농협은 정부와 협의를 통해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경우가 많은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로 돼 있다.
또한 농협은 읍면 등 지역에 있는 생산자를 조합원으로 모아서 만든 지역단위 조직의 특징을 가진다. 이는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생산자를 대상으로 조직을 만들기는 상당히 쉽지만 조합원인 생산자가 재배하는 농산물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아 품목별 조직화 및 규모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의 생산자조직처럼 국가 단위의 품목별 조직화가 완성돼 농산물의 생산 전문성 및 규모화 강화, 재배면적의 자체조절을 통한 공급관리, 생산자가 주도하는 유통 및 가공산업의 계열화, 수출창구 단일화를 통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제고 등의 주요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농업 생산자조직의 진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되는데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자조금사업이 대표적이다. 전국 규모의 품목별 대표조직인 자조금조직은 생산자가 각출한 자조금에 정부 지원금을 합쳐 조성된 자금을 가지고 농산물의 품질제고, 소비확대, 수급관리, 수출촉진 등의 사업을 스스로 수행하는 조직으로 정부의 세세한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는 특성을 띤다. 현재 한우, 한돈, 육계, 계란 등의 주요 축산물 자조금조직은 물론 약 30개 품목의 농산물 자조금조직이 설립돼 활동하는데 앞으로 지역단위 생산자조직인 농협과 차별화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자조금조직 또한 정부가 미국 등의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해 정책적으로 육성하는 사업이 됐는데 농가들이 자조금사업의 특성을 십분이해하고 보다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전과 다른 모습을 주도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