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에너지 패권에 기대 제조업 부활
에너지 부국·빈국 격차 구조적 심화
K 원전, AI시대 국가 경쟁력의 근간

평소에는 그 가치를 잊고 산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바로 에너지다. 1970년대 중동전쟁과 석유파동 때도 그랬고, 미국-이란 전쟁으로 석유·LNG 대란을 겪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에너지를 갖지 못한 나라가 에너지를 가진 나라에 의존하는 것 역시 불변의 사실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에너지 자립에서 에너지 지배로 나아갈 것"이라고 공언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액체 금'을 가진 나라라는 점에 근거해 석유·가스 생산을 최대한 늘리고 에너지 가격을 낮춰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취지였다.
그의 말은 일정 정도 현실이 됐다. 미국·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후 미국의 원유·석유제품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LNG 수출도 역대 최대 수준으로 치솟았다. 중동산 에너지 수입길이 막힌 유럽과 아시아가 미국산 원유·LNG를 찾은 것이다. 미국의 '에너지 패권'이 발현된 셈이다. 이는 결국 외교·안보·경제의 지형을 바꿔놓을 것이다.
에너지 부국과 빈국의 격차는 구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를 수입하는 나라에서 수출하는 나라로 부가 이전되기 때문이다. '페트로달러'는 곧 에너지 수입국의 달러 소모를 의미한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으로 벌어들인 달러로 석유와 LNG를 사온다. 에너지를 자급자족하지 못하면 석유난이 곧 달러난이 되는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국이 1970년대 원자력발전을 도입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만성적인 외화 부족을 완화하기 위한 에너지 다변화 전략의 일환이었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세계 정상급 원전 기술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 삼성전자, 현대차, HD현대중공업이 세계 시장을 누빌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전이 떠받친 값싼 전기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탈원전 정책은 원전 생태계를 허문 데서 그치지 않는다. LNG와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리는 사이 한전·가스공사의 적자가 누적됐다. 이는 언젠가 요금이든 세금이든 간에 국민이 치러야 한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수년 새 75%나 올랐는데 제조업의 가격경쟁력은 떨어졌다.
국내에서는 원전이 위험하다며 더 이상 짓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고 해외 세일즈를 하는 사이 세계 원전 시장은 중국과 러시아가 사실상 양분했다. 최근 10여 년간 진행된 신규 원전 건설의 90% 안팎을 두 나라가 차지했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 탈원전의 반사이익을 누리며 에너지 시장의 지배권을 더 거머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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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국은 해외에서 사 와야 하는 석유와 LNG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태양광·풍력·배터리·전기차 등 재생에너지 분야와 핵심 광물 공급망을 장악했다. 재생에너지 부문에서 OPEC(석유수출국기구)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확보했다. 여기에 세계 최대 원전국을 지향하며 원전 수출까지 보태고 있다. 값싼 전기료를 바탕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함은 물론이다.
전 세계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원전으로 회귀 중이다. 인공지능(AI) 시대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는 이 흐름에 가속도를 더한다. 빌 게이츠, 샘 올트먼 등 글로벌 빅테크 수장들이 데이터센터를 돌리기 위해 SMR(소형모듈원전)과 차세대 원전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전기가 없으면 AI도, 제조업도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경북 영덕과 부산 기장이 각각 대형 원전 2기와 SMR의 최종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K원전은 제 궤도를 찾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원전뿐 아니라 국가가 잃어버린 시간은 회복할 수 없다. 원전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이유와 각국의 에너지 패권 전략을 도외시한 채 10년도 못 가는 에너지 계획에 매달린 대가는 작지 않다. 되풀이해서는 안 될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