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5·18 광주 민주화운동…10일간 이어지면서 5000여명 희생자 발생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지만 이내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으로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된 전두환은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절차에 나선다.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왔다. 이들의 민주화 투쟁은 같은 달 15일 서울역 앞 시위를 통해 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면서 신군부를 위협했다.
하지만 이틀 뒤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조치로 김대중 등 정치인 26명이 합동수사본부로 연행, 2600여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되면서 '서울의 봄'은 허무하게 끝났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항의해 36년 전 오늘(1980년 5월18일) 오전 10시쯤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교문을 봉쇄하던 공수부대 앞에서 "계엄해제"를 외치며 돌을 던지며 시위했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이들을 살상용 특수 곤봉을 이용해 구타·폭행하면서 진압했다.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시위는 민중봉기 차원으로 발전했다. 교문에서 저지된 전남대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을 이어갔고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계엄사령부는 비상계엄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폭력적 진압으로 이어졌다.
시내로 학생들이 쏟아져나왔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이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8일 시작됐던 시위는 일반 시민이 가세하면서 며칠 뒤엔 20여만명의 규모로 확대됐다. 21일부터 계엄군은 발포하기 시작했다. 광주시내 병원과 보건소에는 사상자들이 몰려왔다.
계엄군의 사격에 젊은이들이 쓰러지자 시민도 무장을 하면서 양측 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광주 시내 주요 시설이 시민들의 손에 떨어졌고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이는 계엄군의 광주 봉쇄 작전의 일환이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이루어진 건 27일 새벽. 군인 2만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은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고 전남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작전이 마무리된다.
독자들의 PICK!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 계엄군의 진압으로 인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약 300여명,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800여명으로 집계됐다. 민주화 투쟁은 끝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사회운동과 민중운동의 일대 전환점이 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다 1988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됐다. 이어 1995년에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등 책임자가 구속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뤄졌다.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됐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는 등 상흔이 온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