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초대석
혁신, 도전, 소통, 전문성으로 대한민국 각계 리더들의 성장과 변화를 조명합니다. 과학, 금융, 교육, 공공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전하는 경험과 비전,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소개합니다.
혁신, 도전, 소통, 전문성으로 대한민국 각계 리더들의 성장과 변화를 조명합니다. 과학, 금융, 교육, 공공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전하는 경험과 비전,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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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원장은 1981년 행정고시(25회)를 거쳐 정보통신부 통신기획과장, 전파방송기획단장, 통신방송융합기획단장, 방통위 네트워크국장, 기획조정실장 등 국가 ICT(정보통신기술) 정책을 총괄하는 주요 직책을 맡아왔다. 2010년 방통위를 떠나 법무법인 김앤장의 고문과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등 다양한 산학경험을 쌓은 이 원장은 다시 KISA로 돌아와 공공기관의 장점은 그대로 살리면서 사기업의 역동성과 효율성을 접목한 조직문화 개선에 힘쓰고 있다. 지난 9월 제3대 원장 취임 이후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통해 조직 내 활발한 인적교류를 꾀하는 것은 물론 일반 직원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통해 열린 조직으로의 변화에도 나서고 있다. 특히 2009년 설립 이후 2명의 전임자가 정치행보와 사적인 문제로 중도 퇴진하면서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조직분위기를 다잡을 수 있는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정보통신을 총괄하는 부처에서 주요 의제를 다룬 만큼 KISA에
안택수 신용보증기금(신보) 이사장은 금융위기가 시작된 직후인 지난 2008년 신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경제위기로 중소기업들이 큰 고통을 겪던 시기였다. 중소기업 정책금융을 지원하는 신보의 이사장으로 밤낮 없이 현장을 누볐다. 이후에는 신보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었다. 그러는 중 임기는 두 번 연임됐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36년 신보 역사상 처음으로 재연임에 성공한 이사장이 됐다. 취임 후 안 이사장은 신보 직원들에게 공심(公心)경영을 강조해왔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 바른 양심 위에 공직자적 헌신을 다해 공평무사하게 업무를 처리하라는 당부다. 이 공심을 신보의 보증업무에 대입하면, 부당한 청탁과 사심을 배제하는 보증질서를 확립하는 일이 된다. 신보 직원들과 바쁘게 뛰어온 지 4년6개월 째. 새로운 보증심사 기법을 발굴하고 중소기업의 입장에서 다양한 혁신을 시도했으나, 이런 노력이 제 효과를 내려면 직원들의 윤리성 확립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 안 이사장의 지론이다. 안
"글로벌 경기 침체에 위축된 기업들이 살얼음판 위에 서 있어요. 경기가 워낙 나쁘니까 투자를 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이죠. 얼음판 위에서 엉거주춤 방황하고 있는 겁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올 하반기 신보는 일반보증 규모를 39조5000억원에서 40조원으로 늘렸다. 경기 둔화로 중소기업의 자금난도 가중될 것이란 예상에서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중소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충실히 해 왔던 신보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9월과 10월 두 달 연속 보증수요는 정체를 보였다.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경기가 워낙 나쁘니까 과도하게 위축돼 있는 것"이라고 상황을 진단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위기는 곧 기회"라며 "용감하게 투자를 일으켜 신기술을 개발하고 신시장을 개척하는 기업이 다가오는 호황기에 가장 먼저, 멀리 뛰어오를 수 있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보증규모를 늘려 더 많은 유망 기업을 지원하고 싶지만 막상 투자에 나서는 곳이 없다는 안타까움이다. 우리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활발
센트럴파크가 뉴욕을 상징하는 공원이라면 서울에는 서울숲이 있다. 뚝섬을 재개발해 약 116㏊(35만평)에 달하는 공간에 다양한 테마를 가진 공원을 조성, 2005년 공식 개장한 서울숲은 연간 약 700만명의 시민이 찾는 대표적인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서울시 녹지사업소장으로 서울숲의 화려한 변신을 위한 실무작업을 맡았던 이가 박인규 SK임업 대표이다. 서울숲 외에도 조순 전 시장의 여의도 공원 등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1996), 고건 전 시장의 생명의나무 1000만그루 심기(1998), 북서울 꿈의숲 조성계획(2007) 등 서울시의 녹지와 나무 곳곳에 박대표의 손길이 닿아 있다. 박대표는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기술고시를 거쳐 20여년간 공공부문에서 조경과 녹화를 맡아왔다.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살아온 그는 국내 유일의 복합 임업기업인 SK임업에서 민간 조림 조경 사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을 스스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SK임업은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조림사업
은행권의 사회적 책임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2700만 고객을 상대하는 국내 최대의 은행을 이끌고 있는 민병덕 KB국민은행장의 어깨가 그만큼 무거워졌다. 내년 이익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사회공헌 부문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어서다.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사에서 만난 민병덕 은행장은 "사회적 책임 요구는 시대적인 흐름"이라며 "겸허히 받아들이고 은행만이 할 수 있는 사회공헌을 좀더 연구하고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 행장은 지난 8월 'KB 희망경영'을 선포하고, 직원 중 봉사활동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진 'KB 50인 봉사단'을 꾸려 대한적십자사를 비롯한 긴급구호책임기관과의 협력대응 체제를 구축했다. 'KB 50인 봉사단'은 발대식을 마치자마자 태풍 볼라벤으로 피해를 입은 농가의 복구 지원활동을 펼쳤다. 민 행장도 취임후 2년만에 가진 첫 휴가를 경기도 이천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국민은행은 국내는 물론 은행이 진출한 해외지역에서의 사회공헌에
'성공하려면 남과 달라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 새로운, 낯선 길을 가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살아남기조차 어려운 요즘엔 더욱 그렇다. 1999년 증권업계 후발주자로 시작해 단숨에 브로커리지(위탁매매) 1위로 올라선 키움증권은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회자된다. 2009년 4월 키움증권 사령탑에 올라 연임한 권용원 대표는 지나온 길이 키움증권과 꼭 닮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성공이 보장된 평탄한 길은 재미가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고교시절만 해도 권 대표의 일상은 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종합병원 의사였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이공계로 진학할 때만 해도 '의사 부자(父子)' 얘기는 먼 일이 아니었다. '청개구리' 정신은 대입에서 튀어나왔다. 의예과가 아닌 전자과, 요샛말로 '공돌이'를 선택했다. 한번 도드라진 청개구리DNA는 대학졸업 때도 발휘됐다. 대기업이나 교수를 꿈꾼 동기들과 달리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공직에 들어선 방법도 남달랐다. 행정고시에 응
"국내 금융투자업계에서도 삼성전자와 같은 '슈퍼스타'가 나올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줄 때가 됐습니다." 유례없는 글로벌 경기둔화와 금융당국의 규제 파고에 대해 권용원 키움증권 대표가 던진 '고언'이다. 낡은 관행에 대한 비판은 비판대로, 불공정행위나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에 대한 규제는 규제대로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금융투자회사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이 절실한 때라는 얘기다. 키움증권은 국내 증권업계에서 스타 반열에 오른 곳 중 하나다. 1999년 온라인 증권사 키움닷컴증권으로 시작한 지 10년도 안돼 브로커리지(위탁매매) 1위 증권사로 올라섰다. 무명의 실력파 고수를 발굴해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자는 게 최근 각광받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취지라면 키움증권은 증권업계판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공사례인 셈이다. 키움증권이 값싼 수수료를 내세운 온라인 브로커리지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권 대표는 "키움증권이 값싼 수수료와 온라인 거래로만 승부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브라질 상파울루의 빈민가. 가난해서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한 소년이 있었다. 부모님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7남매를 챙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년은 14살에 벌써 '공식' 직업을 가졌다. 당시 브라질에서 법적으로 취업 가능한 나이는 14세. 하지만 이미 10살때부터 소년은 일을 시작했다. 계산이 빨랐던 덕에 부동산회사, 군복 납품회사에서 장부 적는 일을 했다. 그는 1974년 15세때 드디어 자기가 축구 다음으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됐다. 비록 단순 작업이었지만 글로벌 자동차 회사의 브라질 법인에 입사한 것.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간단히 허기를 떼운 뒤엔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는 중고등학교 야간 과정 수업을 들었다. 어린 소년에겐 전쟁 같은 나날이었지만 즐거웠다. 좋아하는 자동차를 가까이하며 기술공의 꿈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살, 청년이 된 소년은 1979년 제너럴모터스(GM) 브라질 본사에 입사했다. 현장경력과 야간 공부 덕에
국내 인터넷 붐이 일던 2000년 9월. 당시 초기 벤처기업 NHN은 국내에서도 경영이 안정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당시 NHN은 일본진출이라는 결단을 내린다. 2000년 '한게임재팬'으로 시작한 이 시도는 8년만인 2008년, 직원수 800명, 연매출 100억엔(1383억원)의 일본 내 대형 인터넷 기업 'NHN재팬'으로 우뚝 섰다. NHN이 일본 시장에 엄청난 마케팅을 퍼부은 결과일까. 아니다. NHN의 일본내 성공신화는 당시 우리돈으로 단돈 3500만원의 종자돈만 갖고 혈혈단신으로 건너간 천양현 코코네 회장(당시 NHN재팬 대표·사진)의 작품이라는데 대부분 동의한다. 한게임이 일본에서 성공한 벤처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 한가지. 200년대 중반 선술집에서 식사 중인 천 회장에게 식당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길래 그저 작은 벤처 온라인 게임기업을 운영한다고 답했단다. "열심히 해서 한게임 같은 회사로 키워보세요. 한게임은 일본 최고의 온라인 게임 회사랍니다." 실제로 업계에
'홍 뚝심', '돌직구 홍', '홍 열사'…. 지난 9일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홍성열(57·사진) 마리오아울렛 회장에게 새 별명이 붙여졌다. 그의 32년 사업 스토리와 경영철학을 들으면서 추임새처럼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들이다. 의미는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맥락이다. 홍 회장은 1980년 형제들에게 빌린 200만원으로 처음 사업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옷을 좋아했던 그는 편물기 4대를 구입해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직원 4명의 작은 편물업체를 차렸다. 당시 25세의 젊은 사장은 "망해도 200만원 밖에 더 날리겠나"라는 배짱으로 사업에 달려 들었다. 밤잠을 설치며 새로운 디자인의 니트를 생산하려고 애를 썼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만인 1985년 자체 브랜드인 '까르뜨니트'를 선보였다. 일본 바이어들이 홍 회장의 니트 제품에 관심을 보이면서 승승장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국내 니트의류 시장 점유율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최대 니트의류 업체로 성장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문
-1관 증축까지 마치면 아시아 최대 아울렛으로 자리매김 -여성 니트의류 '까르뜨니트' 사업도 지속할 터 -"백화점 세일보다 건질 것 많은 쇼핑공간 만드는 게 꿈" 2001년 7월 구로공단(현 서울 금천구 가산동 '가산디지털단지')에 눈부시게 밝은 조명이 켜졌다. 1970∼1980년대 수출산업의 메카였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여파로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폐허로 변했다. 어둠이 깔리면 인적조차 드물 정도로 황량한 구로공단에선 참으로 오랜만에 새어 나온 불빛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단을 등대처럼 밝힌 조명은 '1회성 깜짝쇼'가 아니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 구로공단을 밝혔다. 구로공단 속 의문의 조명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1호선 지하철을 탄 승객도, 남부순환로를 달리던 운전자도 조명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2012년 구로공단은 '디지털단지'라는 새 이름에 걸맞게 똑똑하게 변신했다. 검은 연기를 내뿜던 공장지대는 하루 수십만명의 쇼핑객이 방문
애널리스트들이 기업을 방문할 때 꼭 둘러보는 곳이 있다. CEO(최고경영자)들의 집무실이다. 경영스타일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인데 기업규모에 비해 집무실이 과도하게 크고 화려하거나 업무와 무관한 사치품이 쌓여있으면 일단 낙제점을 준다. 김범석 쿠팡 대표(34. 사진)의 집무실을 둘러보니 13m²(4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과 회의 테이블, 경영서적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책상 옆에는 소형 냉장고가 있었는데 열어보니 콜라와 에너지 드링크, 이온음료가 가득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밤새 일할 때 졸음을 참기 위해 카페인이 많이 든 음료를 계속 마신다고 했다. 시험을 앞둔 고등학생에 다름없었다. 책상 옆에는 명품가방 대신 평범한 노트북 가방이 놓여 있었다. 집무실은 속들 들여다볼 수 있게 투명 유리창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사실 책상에서 일 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한다. 업무협의가 있으면 노트북을 들고 해당부서를 찾아 직원들 자리에서 함께 회의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디어필드 아카데미를 졸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