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테는 본인이 천재였으니 한 천재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걸 믿고 싶었을 터다. 하지만 자기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도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스즈키 유이 지음,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중에서)
아무리 천재라도 혼자 모든 걸 할 수 없다. 반대편의 말을 경청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해야 한다. 권력의 독점과 남용을 막는 삼권분립도 혼자서는 모든 걸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철학에서 나왔다.
대법관 임명 방식에도 혼자서 모든 걸 하지 말라는 삼권분립의 정신이 담겨있다. 헌법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해 행정부(대통령), 입법부, 사법부에 고르게 지명·선출 권한을 나눈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 방식과 다르다.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권을 독점한다. 대법원장에게만 제청권을 준 건 사법부가 가져야 하는 전문성과 독립성 때문이다. 대법원은 법률 해석의 최고 기관으로 전문성을 요한다. 또 정치 등 외압으로부터 독립해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대법원장의 제청권 독점이 막강해보인다. 하지만 제청권을 가지고 있다고 아무나 제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설득하지 못한 제청권 행사는 허울뿐인 사법부의 독립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헌재 재판관과 달리 대법관은 국회 동의를 얻지 못하면 임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실제 지금까지 국회 동의를 얻지 못해 낙마한 대법관 후보자는 한 명도 없다. 형식상으로 국회에 대법관 임명동의안을 보내는 이는 대통령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대법원장이 제청한 대법관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보내지 않는 경우도 없었다.
대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입법부나 행정부가 원하는 인사를 배제할 수 있지만 대법원장도 자신이 원하는 인사를 대법관으로 앉힐 수 없는 구조다. 대통령도, 대법원장도, 국회도 혼자서는 대법원을 구성할 수 없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법관 제청을 앞두고 대법원장과 대통령실이 물밑에서 협의하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정권 교체 직후엔 협의가 쉽지 않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월21일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4명을 후보자로 추린 뒤 3개월 넘게 지나도록 제청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보통은 2주안에 최종 후보자를 정해 대법관 공백을 최소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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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법원장은 오는 9월 임기가 끝나는 이흥구 대법관의 후임도 제청해야 한다. 조만간 제청 절차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또 내년 5월 임기가 끝나는 천대엽 대법관 후임도 조 대법원장이 제청할 가능성이 높다.
조 대법원장과 대통령실이 대법관 제청에 의견을 모으지 못하면 대법관 공백은 내년 6월 조 대법원장 퇴임때까지 지속될 수도 있다. 대법원장을 포함해 대법관 정원 14명 중 3명이 공석이면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는 당연히 침해당한다. 지금도 대법원에 사건이 쌓이면서 최종 판단이 늦어지고 있다.
국회는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대법관의 수를 단계적으로 26명으로 증원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논란 끝에 통과시켰다. 평소 감놔라 배놔라 하기 좋아하는 국회인데 유독 대법원장과 대통령이 후임 대법관을 제청하지 않고 임명동의안을 보내지 않는 것엔 침묵하고 있다. 대법원 증원 취지를 살리고, 대법관 임명 '동의'라는 업무를 하게 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행정부(대통령), 입법부, 사법부 누구도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괴테'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