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망각의 양면

[기고] 망각의 양면

송기혁 금호생명 사장
2003.03.31 12:55

[기고] 망각의 양면

동전에 앞 뒷면이 있듯이 사물과 현상에는 항상 양면이 존재한다. 어둠과 밝음이 있고 행과 불행이 있으며 과잉과 결핍도 있다. 어느 한 쪽만 취할 수도 그렇다고 모두를 다 같이 병행할 수도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인지라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중간을 선호하기도 한다.

5지 선다형인 5간척도의 설문조사에서도 애매한 질문엔 ‘보통’이나 ‘적당’ 등 가운데 답을 선호하는 ‘중심화경향’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중용’마저 모두 최상의 선택이 될 수는 없을 뿐더러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의 중간은 어디까지냐의 화두처럼.

 

망각(忘却)의 현상도 사람들의 선택을 요구할 때가 많다. 잊어야 할 경우가 있고 때론 잊어선 안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망각은 경험했거나 학습했던 내용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어렵게 되는 것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선 빨리 잊고 싶고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을 기억도 비일비재하다. 아픈 상처, 악몽, 슬픔, 고통 등 온갖 부정적 현상들은 뇌리 속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어 하는 게 어쩌면 인지상정일 수 있다. 잊을수록 좋은 경우다.

 

분명한 것은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세월이 약이 되고 세월이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만인의 지탄을 받았던 배신과 변절의 정치인도 어느 순간 화려하게 다시 등장한다. 세월이 흐르면 잊혀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소리없이 숨죽여 지낸 결과다. 세월이 약이 된 셈이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힘들게 외웠던 단어들이 잊혀져 가는 것이 그토록 원망스럽고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아름다운 추억이 빛이 바래 희미해지고 오랜만에 찾은 길이 이쪽인가 저쪽인가 혼란스러울 때 우린 기억력을 탓한다.

달콤한 꿈 속의 일이 눈을 뜨자 마자 사라질까 두려울 때도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팬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스타들도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모두 세월이 독이 된 경우랄까?

 

반면 와신상담의 고사성어에서처럼 거친 섶 위에서 잠을 자거나(臥薪) 쓴 쓸개즙을 마셔가면서까지(嘗膽) 잊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는 되갚아야 할 마음의 채무관계가 작용하는 것으로 뜻한 바 목표를 일구려는 집념의 사례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오욕의 기념물을 전시하는 것과 성공이 아닌 실패 사례집을 남기는 것은 전철을 다시 밟지 말라는 명제이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일들이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경우다.

 

잊지 않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나 학습법도 있다. 단지 아는 것만으로는 오래 갈 수 없으므로 직접 체험해보고 또 그걸 가르쳐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값진 희생을 통해 어떤 가치를 얻거나 교훈을 느끼게 됐을 때 우린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고 말한다. 그 이면에는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하지만 또 어린 꿈나무들이 화마(火魔)에 스러져갔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듯이 각오를 새롭게 한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항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답시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세월이 가면 또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악몽의 순환 공식.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사회 곳곳의 대형 참사. 언제나 그렇듯이 사고 후에 조명되는 포인트는 인재(人災)였고 얼마든지 미연에 방지하고 예방할 수 있는 사안들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경험을 해야 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더 가르쳐야 잊지 않는단 말인가? 이 사회에 만연한 망각증세에 어린 생명들이 또 무참히 희생됐으니 참으로 애석하고 통탄할 노릇이다.

 

낚시꾼에게 붕어는 망각의 대표적 희생양이다. 구사일생으로 낚시바늘에서 탈출했다지만 그 기억을 망각하고 또 다시 미끼를 무는 미련한 녀석이기에 애처롭기까지 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사고와 망각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참사의 과정이 어찌 붕어의 경우와 비교하지 못하랴.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며 또 잊으려 하는가?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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