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출근길이었다. 앞차가 난데없이 급정거를 했다. 하마터면 앞차 엉덩이를 들이박을 뻔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차로가 좁아지는 길에서 인도에 서 있는 사람을 태우려고 급하게 차를 세운 거였다. 아마도 길이 서툰 사람인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은 마음으로 그 옆을 지나가는데, 차 안의 운전수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몸짓이 내겐 이렇게 번역되었다. ‘아 참, 미안해요.’ 그러자 내 오른손도 저절로 올라갔다. 그에게 내 팔짓은 이렇게 번역되었을 것이다. ‘뭘요, 괜찮아요.’ 그러고 나니 출근길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날 저녁에는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동네 축구 클럽 사람들과 평소처럼 공을 차는데, 상대팀의 새로 온 젊은 선수 때문에 말썽이 생겼다. 기술 좋고 몸이 빨라 우리 수비수가 애를 먹다가 조금 거친 플레이가 나왔다.
잠시 후 상대의 보복성 반칙이 나오자 이 두 젊은 다혈질 간에 신체적 분쟁이 벌어졌고, 양쪽에서 한발씩의 인간 미사일이 날아들어 자칫 전면전이 될 뻔했다. 그래도 소방수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 급한 불을 끄고, 폭탄들의 뇌관을 제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첫 번째 반칙이 일어났을 때가 문제였다.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는 동작 한번만 있었으면 끝날 일이었다. 그걸 생략하는 바람에 두 다혈질은 안면 등에 부상을 입었고, 3년 넘게 이어진 두 팀 간의 교류의 역사가 중단될 뻔했다.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뒷목이 뻣뻣했다.
내가 최근에 시작하게 된 20년짜리 장기 프로젝트가 있다. 이름하여 착한 노인 되기 프로젝트. 아내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몇인데 벌써 노인 될 준비란 말이냐고 항변했으나, 이제는 당신도 이미 내리막쪽으로 꺾인 몸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함께 보아온 괴팍하고 가까이 하기 싫은 노인들의 예를 콕콕 찍어 드는 데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방치하면 나도 그런 노인이 될 확률이 매우 크다는 것이 아내의 말의 요지였다. 내 조폭한 성정을 감안할 때 능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아내가 제시한 내용인즉 간단했다. 화내지 말기, 소리내어 웃기, 입은 닫고 지갑은 열기 등등. 물론 실천이 어려운 것들이다. 거기에 내가 추가한 것이 있다. 신념 노출증을 멀리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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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이 사는 데 신념 같은 게 없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신념을 밖으로 드러내고는 일이다. 결연한 표정이나 확신에 찬 어조, 오만한 태도 같은 것이 동반되는 경우는 최악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에 부담스러울 뿐더러, 사고를 치더라도 전쟁이나 대량학살 같은 대형 사고를 친다.
자기 신념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 악의 무리를 퇴치해야 한다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 한번 정의된 악의 개념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무반성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자기 신념에 목숨 걸겠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속물이면 그래도 다행인데, 정말로 이를 실천에 옮기면 괴물이 된다. 피해 규모라는 면에서는 그래도 괴물보다는 속물이 낫다.
최근 개신교의 일부 목사와 장로들의 언동이 문제가 되고 있다. 기독교는 그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교리로 인해 스스로 삼가야 마땅한 종교다. 내가 예배당에서 배운 최고의 가르침은 온유함이다. 사랑이라고 해도 좋고 경건함이나 겸손함이라고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태도이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절에 다니면 가난해진다는 목사들의 발언은 기독교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원시 기복주의 신앙으로 타락시키고 있다. 부끄러워할 일이다. 그들이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신의 이름을 빌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주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나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제발,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살자. 온유함을 잃은 천사가 사탄이다. 우리가 천사는 못되더라도 괴물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