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무싸', 지나치게 거슬리는 그러나 지나칠 수 없는 박해영의 세계 [드라마 쪼개보기]

'모자무싸', 지나치게 거슬리는 그러나 지나칠 수 없는 박해영의 세계 [드라마 쪼개보기]

한수진 ize 기자
2026.04.20 11:54
박해영 작가의 신작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사랑스럽고 완벽한 주인공, 친절한 설명,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 등 요즘 드라마의 흥행 공식을 따르지 않아 불친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 황동만과 주변 인물들의 짜증과 냉소, 뼈 때리는 대사로 시청자의 가슴을 건드리며,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안의 나약함과 불안을 다룬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와 같이 세상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주변인들의 고립감과 삶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들의 밑바닥 감정을 집요하게 들춰내며, 인물들이 서로의 무가치함을 직시하고 끌어안음으로써 구원받는 서사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열패감, 수치심, 시기, 질투 등 인간의 치졸하고 연약한 민낯을 여과 없이 전시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작은 숨통을 틔워주는 불완전하고 쓸쓸한 연대를 통해 위로를 전한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컷 / 사진=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컷 / 사진=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박해영 작가의 신작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는 불친절하다. 사랑스럽고 완벽한 주인공, 친절한 설명,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여야만 사랑받는 요즘 드라마의 흥행 공식을 하나도 따르지 않아서다. 주인공 황동만(구교환)은 입만 열었다 하면 악담을 쏟아내는 별스러운 밉상이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역시 짜증과 냉소를 감추지 않는다. 8인회 멤버 준환(심희섭)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 하나 다정하지 않은 이 드라마는, 시종일관 뼈 때리는 대사와 불편한 상황들로 시청자의 가슴을 툭툭 건드린다.

지나치게 거슬리는 드라마. 그러나 지나칠 수 없는 드라마다.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그 지점들이 차마 불편해서 외면했던 우리 안의 나약함과 불안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박해영 작가의 글은 '나의 아저씨'(2018) 때부터 고유한 정서와 결을 구축해 왔다. 이번 JTBC 토일드라마 '모자무싸' 역시 큰 틀에서 '나의' 시리즈가 가진 정서적 맥락을 공유한다. 세상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웅크린 주변인들의 깊은 고립감,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죽여 앓는 현대인들의 밑바닥 감정을 집요하고도 투명하게 들춰낸다는 점이 그렇다.

'나의 아저씨' 이지안(아이유)과 박동훈(이선균)이 각자의 지옥 같은 현실에서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연민했고, '나의 해방일지'의 삼남매와 구씨(손석구)가 변두리의 삶 속에서 지독한 무력감으로부터 해방을 갈망했듯, '모자무싸'의 인물들 역시 지독한 결핍과 싸우고 있다. 빚에 쫓기는 파견직 여직원이나 장거리 출퇴근의 피로에 절어있는 경기도민에 이어, 이번에는 20년째 제자리걸음 하며 타인의 성공에 초를 치는 만년 영화감독 지망생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모자무싸'는 열패감, 수치심, 시기, 질투 등 우리가 애써 감추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가장 치졸하고 연약한 민낯을 여과 없이 전시한다. 그러나 박해영 월드의 진짜 마법은 이토록 바닥을 치는 인물들이 기어코 서로를 구원해 내는 방식에 있다. '나의 아저씨'가 "편안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쓸쓸한 이해였고, '나의 해방일지'가 텅 빈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채우는 맹목적인 추앙이었다면, '모자무싸'는 서로의 지독한 무가치함을 직시하고 끌어안음으로써 켜지는 안온의 초록불이다. 화려한 성공이나 거창한 극복 대신, 나와 똑같이 부서지고 지질한 누군가와 상처를 기대며 아주 작은 숨통을 틔우는 것. 이 불완전하고도 쓸쓸한 연대의 서사가 바로 '나의' 시리즈부터 '모자무싸'까지 관통하는 핵심 정서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컷 / 사진=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컷 / 사진=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이러한 정서적 맥락 때문에 여주인공이 풍기는 고유한 분위기 역시 전작들과 결을 같이 한다. '모자무싸'의 여자 주인공 변은아(고윤정)는 '나의 아저씨' 이지안과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김지원)의 또 다른 분신처럼 작품 한가운데 서 있다. 핏기 없고 무미건조한 얼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세상을 관망하는 듯한 태도는 전작의 주인공들이 보여줬던 바로 그 버석한 모습이다.

때문에 이 작품도 박해영 작가의 전작들이 안고 있던 씁쓸한 특징을 반복한다. 바로 여자 주인공을 향해 가해지는 주변인의 폭력성이다. 은아는 날카로운 시나리오 '도끼질'로 감독들의 신뢰를 얻지만, 자신보다 유능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최필름 대표 최대표(최원영)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노골적으로 구박하고 박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몫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미움을 자초하는 동만과 달리, 은아는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미움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한 처지다.

남자 주인공의 결은 좀 다르다. '나의 아저씨' 동훈이나 '나의 해방일지' 구씨가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진 묵직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구교환이 연기하는 동만에게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미숙함과 치기가 서려 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고 엇나가는 모습은 마치 제어장치가 고장 난 사춘기 소년 같다.

'모자무싸'의 두 남녀 주인공은 각자의 '감정 워치'(실시간으로 감정 상태를 측정해 색깔과 텍스트로 보여주는 시계 )에 뜬 붉은 경고등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 친다. 동만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뾰족한 독설과 허세로 20년째 데뷔하지 못한 자격지심과 내면의 허기를 덮으려 하고, 은아는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서늘한 태도 뒤로 부당한 억압과 오랜 고립감이 만들어낸 극도의 스트레스를 숨긴다. 달뜬 소음과 차가운 침묵이라는 상반된 방어기제로 자신들의 위태로운 밑바닥을 필사적으로 가린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컷 / 사진=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 컷 / 사진=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동만이 극에서 오랜 기간 집착하는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는 이 드라마의 색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날씨로 표현하자면 해 질 녘 오묘하게 번지는 어스름한 붉은빛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오묘한 경계의 색이다. 낮의 명징함(성공)도, 밤의 완전한 어둠(포기)도 얻지 못한 채 붉게 타오르는 열패감 속에 갇힌 상태 그 자체다.

그럼에도 이 껄끄러운 드라마가 시청자를 위로하는 방식은 역설적이다. 2회 방송 말미 "내 인생이 왜 니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요?"라며 오만한 세상을 향해 들이받는 동만의 선전포고는 처절해서 눈부시다.

은아는 동만의 시나리오에 관객을 끌어당길 파워가 없다고 냉정하게 평가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슴이 막 뛸 거다"라는 진심 어린 통찰을 건넨다. 서로의 무가치함을 직시한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의 감정 워치에 초록불을 켜 보이는 순간, 비로소 이 숨 막히는 잿빛 현실에 숨통이 트인다.

입만 열면 악담뿐인 별스러운 주인공 동만에게 묘하게 잠식당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동만과 같은 지질함과 불안을 속내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잘나서 증명할 수 없을 땐 망가져서라도 나를 증명하겠다는 이 지독한 난장이, 기어코 어떤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지 지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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